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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면 미륵리 미륵리석등(水安堡面 彌勒里 彌勒里石燈)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수안보면 미륵리 미륵리석등(水安堡面 彌勒里 彌勒里石燈)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0. 10. 5. 07:24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 전기 석등.

미륵리 석등이 세워져 있는 사찰에는 석불입상, 오층석탑, 당간지주, 귀부 등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조성된 많은 유적·유물이 남아 있다. 이 사찰은 미륵신앙과 관련되어 있어 미륵리 사지로 불리고 있는데, 창건 시기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적·유물이 전하지 않아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관련된 사찰로 전하고 있으며, 사지에 남아 있는 유물들과 발굴 결과를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한 사찰로 여겨진다. 조사 당시 대원사(大院寺)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되기도 하여 절 이름을 알게 되었다.

 

 

석등은 사찰에서 중요 법당이나 석탑 등의 정면에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불교에서 석등은 불을 밝혀 어두운 곳을 비춘다는 기능적인 측면도 있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부처의 자비와 진리에 비유되는 빛을 통하여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이 석등도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가람의 중요 석조물로 건립되었을 것이다.

석등은 사찰의 중심축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양식으로 보아 석불입상이나 오층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팔각석등은 사각석등에 비하여 건립 시기가 빠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팔각석등은 고려시대 들어와 미륵리 사지의 사세(寺勢)가 크게 확장되면서 건립된 중심적인 석등으로 보인다.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위치한 미륵리 사지의 석불입상과 오층석탑 사이에 세워져 있다.

미륵리 석등은 크게 기단부, 화사석, 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매몰되어 있어 지대석의 형태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하대석은 수평에 가깝도록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복판(複辦) 연화문이다. 연화문은 돋을새김이 강하여 생동감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하대석 상면에는 팔각으로 괴임대를 두고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팔각형의 간주석(竿柱石)이 견고하게 삽입 고정되도록 했다.

상대석은 하부에 낮은 받침을 마련한 후 앙련문(仰蓮紋)을 장식하였다. 하대석과 상대석의 연화문 표현 기법은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이 석등의 건립 시기를 추정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화사석은 네 곳에 사각형으로 화창(火窓)을 마련하였으며, 화창이 없는 면의 너비를 좁게 하여 전체적인 평면이 부등변팔각형을 이루도록 했다.

 

 

옥개석(屋蓋石)은 팔각형으로 처마부를 수평으로 치석하여 정연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리고 옥개석의 낙수면(落水面)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도록 하였으며, 낙수면의 각 면이 만나는 마루 끝의 합각부(合閣部)를 살짝 치켜 올려 경쾌한 인상을 주도록 했다. 상륜부는 낮은 받침대와 연봉형 보주가 올려져 있다.

미륵리 석등은 석불입상과 오층석탑 사이에 있으며, 중심 축선의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원위치인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불을 밝히는 화사석이 일부 파손되어 있으며, 상륜부 부재들이 일부 결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들어와 불교가 크게 성행하면서 전국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찰이 창건 또는 중건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석탑과 석등이 사찰 가람의 중요 석조물로 건립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석등 양식을 계승한 석등도 건립되지만 독특한 양식의 석등도 많이 건립되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와는 차별화된 불교에 대한 인식과 다양화된 문화적 요인 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장인이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석등이 건립되는데, 팔각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등 양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면서 부분적으로 장식이나 치석 수법이 고려화(高麗化)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