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회남면 남대문리 양달해효자문(懷南面 南大門里 梁達海孝子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회남면 남대문리 양달해효자문(懷南面 南大門里 梁達海孝子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5. 30. 09:42

남대문리는 본래 회인군(懷仁郡) 서면(西面)의 지역으로서 호점산성의 남문 밖이 되므로 남대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지동(晩旨洞), 거구리(巨九里)와 후곡리(後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남대문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

양달해효자문은 원래는 신곡리에 있었으나 1980년 대청댐 담수로 남대문리로 이건하였다. 1905년(광무9) 효자 양달해(梁達海)와 효열부인 그의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정문으로 잘 관리되고 있다.

 

거구리 입구에 있으며 현판은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양달해지려(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梁 達海之閭)  효부증영인안동김씨지려(孝婦贈令人安東金氏之閭)로 되어 있다. 1905년(광무9)에 명정되어 남편의 아내의 효행을 기리는 정문으로 처음 신곡리에 세웠으나 1980년 대청댐 담수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효자문옆에 세워진 비석입니다.

양달해는 일찌기 어머니가 큰병으로 백약이 무효하여 목숨이 위중하니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단지함으로서 어머니에게 자신의 피를 흘려 드시게 하니 어머니의 병이 씻은듯이 나았다고 한다. 이에 많은사람들이 양달해의 효성에 감탄하였다.그 후에 어머니가 천수를 누리시고 그의 나이 58세에 돌아가시니 어머니의 산소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때 시묘살이를 하면서 양달해가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 하늘에 감동하여 영초가 자라니 여름에는 꽃이 피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잎이 마르지 아니하였다. 또한 밤 늦은 시간에 산소와 집을 오가는 길에는 항시 커다란 호랑이가 양달해를 등에 태우고 다니니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사람들은 양달해의 효성에 감동하였으며 양달해가 시묘하던 묘막이 있던 곳은 지금도 지명이 묘막이 되였다. 양달해의 처인 안동김씨는 양가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한 일가친척들에게도 우애로 항시 대하니 그 또한 양달해와 더불어 효성이 지근에 가득하였다. 이에 양달해와 그의 부인인 안동김씨에게 조정에서 광무9년에 정려하였다.

 

 

중수기등의 현판등이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양달해(梁達海) 1702(숙종 28)~1781(정조 5) │ 조선 후기의 학자·효자로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호연(浩然), 호는 치재(嗤齋)이다. 보은군 가습(可習)에서 회남면 남대문리로 옮겨온 양경(梁鯨)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양효안(梁孝顔), 아버지는 율담(律潭) 양필도(梁苾道), 어머니는 단양 우씨로 우하길(禹夏吉)의 딸이다. 양통해(梁通海) 의 형이며, 회남면 판장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안동 김씨(安東金氏) 김진주(金震 柱)의 딸이다. 수암 권상하의 문인이며 인산(仁山, 회인) 6처사의 1명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라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가져다 드려 고을 에서 효동(孝童)으로 이름이 났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으로 연명하며 시묘 하였으며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는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같이 시묘하였다고 한다. 나이 18세에 황강에 있던 권상하를 찾아갔을 때 권상하가 시부(詩賦)로 그의 재주를 시험하고 나서 “그대는 참으로 하늘이 낸 학자로다.”라고 칭찬하였으며, 이 듬해 다시 찾아가자 자신이 이미 늙고 병이 들어 가르칠 수 없다며 그 문인 평실재 (平實齋) 어유성(魚有成)을 소개하여 학업을 마치게 하였다. 이곳에서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미호(渼 湖) 김원행(金元行)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대성하였다. 송환기는 그를 가리켜 “회인의 양달해는 공자의 제자 안자와 같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의 부인 안동 김씨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부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905년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증직되고 부인 김씨와 함께 명정되어 정려문이 회남 면 신곡리에 세워졌다. 정려문은 대청댐 수몰로 남대문리로 옮겨졌다

 

 

단청등을 새로하여 깔끔하니 보기가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