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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면 문동리 동화사 비로불(南二面 文東里 東華寺 毘盧佛) 본문

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남이면 문동리 동화사 비로불(南二面 文東里 東華寺 毘盧佛)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7. 29. 12:39

 

 

남이면 문동리 동화사 대적광전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불입니다. 높이 1.48m.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8호. 이 불상은 원래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던 동화사 서편의 산 능선에 손상된 채로 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 현재의 절을 중수하면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동화사란 사명(寺名)은 근래에 와서 붙인 것으로 불상의 원위치로 추정되는 지점에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와편(瓦片)과 석탑 부재가 흩어져 있다. 비로자나불은 현재 법당 내에 봉안되어 있다. 화려한 8각 연화대좌(蓮華臺座) 위에 앉아 있는 좌상의 형태를 하고 있다. 두부(頭部)는 일부 파손되었고 후대의 보수가 더해진 까닭으로 원래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린 비만한 방형(方形)의 얼굴에 작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있으며 반타원형의 눈에 새로 그려 넣은 눈동자가 생경하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희미하다. 그리고 후보(後補)된 귀는 나머지 부분과 조화되지 못하고 다소 겉도는 느낌을 준다. 이 점은 지나치게 날카로운 코 또한 마찬가지라 하겠다. 목에는 굵은 고리형의 삼도(三道)를 돌리고 있다. 두껍게 개금을 입힌 탓으로 차가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침울한 기운이 느껴진다. 착의 형식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통견(通肩)에 가까운 모습이다. 굵고 소략하게 처리된 옷주름에서 다분히 형식화되고 있는 옷주름 무늬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어깨를 감싸며 흘러내려 온 옷자락이 팔꿈치를 지나며 굵게 주름 잡히고 가슴에서부터 U자형의 옷주름이 앞으로 흘러내린다. 신체에 밀착된 불의(佛衣)를 통해 신체의 굴곡과 살집이 얼마간 드러나 보이나 전반적으로 차갑고도 건강한 인상을 풍긴다. 수인(手印) 또한 정확한 형태 파악이 어렵다. 왼손을 위로 하고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몸 앞에서 오른 집게손가락을 왼손으로 감싸고 있다. 통식(通式)에서 벗어난 다소 서투른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전형적인 3단 8각연화좌이다. 법당의 마룻장을 뜯고 8각의 지대석(地臺石)을 놓았는데, 지대석과 한 돌로 조성한 하대석의 경우 화려한 복판(複瓣) 8엽(葉)의 앙련(仰蓮)을 새기고 각 모서리에는 다시 귀꽃 장식을 덧붙이고 있다. 중대석(中臺石)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를 새겼다. 면석(面石) 내부에는 향로, 합장한 공양상,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지권인을 결한 결가부좌의 여래상이 부조되어 흥미를 끈다.

상대석에는 8엽의 앙련을 조각하였다. 연판(蓮瓣) 사이 사이로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정교하게 배치하였다. 석불의 조성 연대는 대좌의 형식, 존안(尊顔)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 내려 볼 수 있겠다

 

 

 

임진왜란때 청주로 진격하던 왜군기세 꺾어놓은 불상이라고 합니다.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관련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청주로 진격하던 가토 키오마사(加藤淸正)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 무렵 동화산 자락 동화사 경내의 석불좌상에는 얼마전 부터 부처의 몸체에 물방울이 맺히면서 가끔 한숨소리가 절안에 들려왔으므로 모두 불길한 징조라고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파죽지세로 청주성으로 진격하던 왜병이 이 곳을 지나가는데 말굽이 떨어지지 않아 주위를 살펴보니 정면의 동화산 중턱으로 부터 강렬한 빛이 일직선으로 비쳐와 눈으로 파고 들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행렬이 흐트러지게 된것이였다. 이에 왜병진영에서는 부처님의 눈썹사이 흰터럭으로 무량세계에 광명을 비춘다는 방광(放光)으로 해석을 내리고 그 방광을 향해 찾아가 보니 법당에 석불에서 나오는 두광(頭光)이 아닌가! 그 두광은 마주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빛을 쏘아대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왜장이 목숨을 걸고 뚫어지게 바라보자 후광은 서서히 사라지고 정면을 응시하던 석불의 상호가 돌아가면서 왜장을 외면하였다. 독실한 불자로 자처한 왜장이 부처님으로 부터 외면 당하자 분노에 찬 왜장은 장검을 빼어 석불의 목을 쳤다

 

 

그때 피를 흘리며 떨어진 석불의 두상은 왜장의 발목을 뿌러트리게 되고 더욱 분기탱천한 왜장은 부하들을 시켜 횃불로 절을 샅샅이 태워 버리도록 명령했다. 이어 왜병들은 발목이 부러진 왜장을 이끌고 고분리(지금의 고은리)로 향하는데 갑자기 맑은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히더니만 뇌성벽력과 함께 억수같은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왜병들은 비를 피하고자 근처에 있던 천년묵은 느티나무 아래로 모여들게 되였다.

그때 고목을 찟는 기세로 느티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순식간에 절반 이상의 왜병이 몰살하게 된다이후 겨우 전열을 추스려 청주읍성에 진격한 왜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대사의 공격으로 궤멸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임진란 최초의 아군 승전보인 청주성 전투의 제물이 되였던 것이다.그 후 부처님의 은혜로 대를 잇게된 마을유지가 부처님의 머리를 찾아서 보수를 하였는데 실수로 그만 약간 측면을 바라보게 되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