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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 음성군수 이해용청덕기념비(邑內里 陰城郡守 李海用淸德記念碑) 본문
오래전에 들렸던 음성향교를 다시 한번 더 들려 공적비를 살펴보는데 이해용의 기념비가 보이질 않는다. 아픔도 역사라고 친일파의 비석이라고 없앤것은 아니길 바랄뿐이다. 없애는 것이 아니고 따로 안내판을 설치하여 학습의 장으로 삼았으면 더 좋치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이다. 이해용의 비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해용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해용 공적비중 일부는 훼손돼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비 좌측 하단에 ‘己巳六月’(기사(년)육월)란 글자가 육안으로 확인된다. 즉 기사년(1929년) 6월에 비를 건립한 것을 알수 있다. 또 친일파 이해용(李海用의) 한자이름과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 동일하다. 청주백제유물전시관 강민식 박사는 “음성향교 앞에 설치된 이해용 기념비는 일제 때 세워진 공덕비의 전형적인 양식을 띄고 있다”며 “‘己巳’란 글자에서도 알수 있듯 1929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음성군 관계자는 “현재 지역 향토사연구회에 비에 대한 해석을 의뢰했다”며 “친일파 이해용의 비로 판명되면 음성향교와 논의해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일제 치하를 겪은 어르신들도 몰랐던 부분이다"며 "늦었지만 개선점을 찾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참가자들이 참살하거나 불지르겠다고 했던 친일파 이해용. 하지만 100년이 지난 후손들은 오히려 그의 공덕이 새겨진 비를 문화유적이라고 하는 웃지못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한편 이해용은 광복 이후인 1949년 8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수했지만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독립운동에 찬동하고 운동자를 검거하지 말 것이며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시는 참살시키던지 불을 지르겠다.”1919년 3월 20일 강화도 부내면 출신으로 매일신보 기자이자 사립학교 교사인 조구원은 강화결찰서 경부 이해용(李海用, 일본이름: 三州海用 산슈가이요, 1891년 1월 6일 ~ ?)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낸다.들불처럼 번진 3·1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에 대해 같은 조선사람으로 탄압하지 말라는 경고였다.하지만 이해용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산슈 가이요’였다. ‘산슈가이요’는 1919년 4월부터 5월까지 경기도 강화 지역에서 일어난 3·1 운동 관련자 8명을 심문했다.
강화도 지역의 3·1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가혹했다. 3월 27일에는 독립만세 시위대에 총을 쏘았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은 체포돼 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고 일부 인사들은 옥사했다.그래도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3·1만세운동은 이듬해 가을까지 계속됐다. 1년 뒤에도 강화지역 인사들은 중앙광장에 “만세를 부르라. 불응하는 자는 새나 짐승에 가까운 자다”라며 쓰며 일제에 저항했다. [충북인뉴스참조]
[충청투데이 김영 기자] 음성군 음성향교에 입구에 세워진 친일파 이완용의 6촌 이해용 공덕비가 16일 철거됐다. 음성향교는 이날 ‘유림독립항쟁파리장서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친일파 이해용의 공덕비를 철거했다. 이해용은 친일매국노 이완용과 6촌 관계로서 대통령소속 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의하면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 그는 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조사과 서기로 근무하다 1918년 일제의 경찰이 됐다. 소속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1918년 5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로 임명됐다. 1918년 9월 23일 경기도 강화경찰서 경부(경찰서장)로 발령됐다. 이해용은 이후 음성군수(1927년 3월 31일 임명), 제천군수(1929년 4월 13일 임명), 괴산군수(1930년 4월 16일), 영동군수(1932년 11월 8일 임명), 청주군수(1936년 11월 12일 임명)를 역임했다. 일제로부터 1928년 쇼와 대례 기념장, 1931년과 1937년 훈6등, 훈5등 등의 훈장을 받았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쌍광욱일장을 받았다./기사작성 2019년4월17일
출처 : 충청투데이(https://www.cctoday.co.kr)
대통령소속 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에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의하면 이해용은 철저한 친일파다. 친일매국노로 유명한 이완용과 6촌인 이해용의 초명은 이시용(李始用)이며, 본적은 경성부 숭이동이다.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조사과 서기로 근무하다 1918년 일제의 경찰이 됐다. 소속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1918년 5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로 임명됐고 1918년 9월 23일 경기도 강화경찰서 경부로 발령됐다. 경부는 지금으로 치면 경찰서장급에 해당하는 직위다.이해용은 경찰로 시작했지만 이후 행정관료로 충북 음성군수(1927년 3월 31일 임명), 제천군수(1929년 4월 13일 임명), 괴산군수(1930년 4월 16일), 영동군수(1932년 11월 8일 임명), 청주군수(1936년 11월 12일 임명)를 역임했다.그가 일제로부터 받은 훈장도 수두룩하다. 1928년 일제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 1931년과 1937년 훈6등과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쌍광욱일장을 받았다.그의 관직은 일제 패망때까지 계속 유지됐다. 충청북도정보위원회 간사(1937년과 1938년), 청주군군사후원연맹 회장(1937년), 국민정신총동원충청북도연맹 이사(1938년), 충청북도유도연합회 평의원(1939년)을 지냈다.충청북도 청주군창씨후원회 회장(1940년)을 겸임하면서 군용물자 공출과 국방사상 보급에 주력하는 등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이 외에도 충청북도임금위원회 위원(1940년), 함경북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1941년), 경상북도 참여관 겸 식량부장(1943년), 경상북도 농상부장(1943년 12월~ 1944년 10월)을 지냈고 1945년 2월 11일 대화동맹 심의원으로 선임됐다.이해용의 친일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언론에 친일을 조장하는 글을 앞장서서 게재했다. 1942년 8월에 발행된 잡지 ‘조선공론’(朝鮮公論)에서는 농민들에게 총후의 증산전사(增産戰士)가 될 것을 강조한 글을 게시했다. 시 ‘무적황군’(無敵皇軍, 동아의 대륙과 바다에서 연전연승하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음)〉을 기고했다.[충북인뉴스참조]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음성군수를 지낸 이해용의 기념비입니다.이해용은 보성전문대출신으로 1927년에 음성군수를 지낸 뒤 1929년에는 제천군수,1930년에는 괴산군수,1932년에는 영동군수를 지내는 등 충북지방의 여러 곳에서 군수직을 했습니다.비석의 건립시기는 음성군수를 마친 해인 기사년(己巳年)인 1929년이다.전체 높이는 182㎝이며 비신(碑身)은 높이가 129㎝, 앞면의 폭 50㎝, 측면의 두께가 22㎝이다.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53㎝이며 앞면의 폭은 79㎝, 측면의 두께가 58㎝이다.비석 앞면에는 '군수이후해용청덕기념비(郡守李侯海用淸德紀念碑)'라고 쓰여 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 풍속을 바로잡고 인륜을 밝혔다네. 삼년 동안 정사를 보면면서 온 고을에 인을 이루었다네(愛民□□ 救俗明倫 三載爲政 萬家百仁)'이라고 쓴 송시(頌詩)가 있다.[디지털음성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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