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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우산리 지아지효자문(東二面 牛山里 池阿只孝子門) 본문
우산리 지매마을 초입 찾기가 힘들다. 네비에 의지하여 우산리를 찾으면 우산1,2리로 나뉘어져 있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지매마을은 우산2리이다. 우산2리 길로 접어 들어서 금강유원지쪽이 아닌 산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계속 오르면 산중턱에 전원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지아지 효자문은 마을 중간 잔디밭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의 효자문은 쇠락하여 충주지씨문증에서 새로 효자문을 중수하였다. 효자의 이름이 자료에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옥천군지를 참조하면 지악지(池岳只)라 적어 놓았습니다. 岳只는 지아지의 字입니다.원래의 이름과 자를 혼용하여 사용하니 각 자료마다 이름이 달리 나오는것이지요. 지매마을에 있는 효자비에 새겨진 이름은 지아지(池阿只)입니다. 효자문의 이름을 사용하겠습니다.
효자문은 동이면 우산리 지매마을에 있다. 1781년(정조 5)에 세워진 정려이다. 건물 양식은 다포 형식의 공포와 맞배지붕 형태의 목조기와 집이다. 건물은 1평으로 건립되어 있으며, 현재 충주지씨忠州地氏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숙종 임금 때 태어난 지아지(지석우, 地碩愚)는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고 밀양박씨와 혼인한 후,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으며 삼강오륜에 벗어나지 않게 살았다. 병들어 계시는 노모를 위해 추운 겨울 금강에 나가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 봉양을 하고, 사시사철 산과 들로 몸에 좋은 약초 를 찾아다니며 정성을 다해 모셨다.
임금이 바뀌어 영조임금 때인 1727년 2월 17(음력), 지아지가 화전을 일구어 보리밭을 매고 있는데 갑자기 동네 쪽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일손을 멈추고 단숨에 달려와 보니, 노모가 누워 계신 초가에 불이 나 활활 타고 있었다. 지악지는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 어머니를 이불에 둘둘 말아 업고 뛰어나오다가 초가집이 무너져 탈출하지 못하고 죽었다.일설에 의하면 이 때 지아지는 죽고 어머니는 살아서 관에서 어머니를 돌보았다는 이야기가 구전된다고 한다.
1723년 문과에 급제한 암행어사 박문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암행을 하여 지매에서 효가 났다고 영조임금께 아뢰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손주 정조(이산)가 등극하고, 1781년에는 지극한 효성이 알려져 목와조익공木瓦造翼工 효자문 집 1평을 하사 받게 되었다. 한편 지씨 문중에서는 조정에서 세워준 정문이 너무 낡아 폐허가 될 위기에 처하자 효자문 을 새로 단장했다.
정려각안에는 1983년에 새로 세운 지아지의 정려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매마을은 옛날에는 한촌이었지만 지금은 전원주택등이 자리하며 나름 옥천군에서 여러가지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입니다.
우산리는 1965년 4월 1일 개교하여 1994년 3월 1일 폐교되고 2008년 현재 우산분교로 남아있는 우산초등학교가 위치했던 곳으로 본래 이남면(이원) 우두미리(牛頭尾里)라 불리다가 산서동(山鼠洞)과 합하여 우산리가 되고 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이원면에서 동이면에 소속하게 되었다.
1739년 기록에는 우두미리라 하여 72호가 살았고 1914년 행정구역 조정 때 우두미리와 메쥐골(산서동)을 합하면서 우두미리의 우(牛)자와 산서동의 산(山)자를 따서 우산리가 되었다.
마을명칭을 우두미리라 한 것은 우산리와 지탄리를 경계하는 철봉산 모양이 큰 황소가 누운 것 같다하여 우두미라 부르게 되었고, 산에 작은 산쥐가 많아 뫼쥐골, 메쥐골이라 부르던 마을을 한자화 하여 산서동(山鼠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벌말(벌마, 넓고 평평하게 생긴 땅), 안말, 지매, 메쥐골 등이 있다.
안말 주변에는 홀메기, 배남골, 선두골, 샛별봉, 먹우달, 가릅재, 삼부랑날, 달밭메기, 생터골, 동메, 성두레, 갱주골, 웃골, 두겁재, 아침골, 참샘골, 망진고개, 중봉, 불당골, 소머리재, 화장골, 선반다리, 도둑골, 모시밭골, 괴골재, 어름밭골이 있다. 또한 겸나무골, 어름덤부렁, 목너메, 장차말, 솓다배기, 질마산, 중소, 그나들이, 사천날망, 말구리, 서당재, 승주골, 동산, 매봉재, 민벌, 앞산, 살구남재, 여수골 등이 있고 마을 입구에 마을회관이 있다.
지매마을 주위 마을입구에 지아지(池阿只)효자문, 베틀굴과 약사사가 있는 큰소골, 방개골, 지매골이 있고, 벌말 주변에 배마티나루, 가마소, 매봉, 석발산, 술멍재, 중소, 참상골, 도차골, 메골, 누릅바우, 늪시, 질마산 등이 있다. 벌말 가운데에 회관이 있다.
큰소골에 자리 잡은 금강약사사는 일주문, 관음전, 법당 등을 건설하고 원래 철봉산이라는 이름도 사찰 경내의 산을 영취산이라 고쳐 부르고 있었다. 지매마을의 서당재는 송시열선생이 산날망에 서당을 짓고 공부하던 곳이며, 병자호란 때 충주지씨(忠州池氏) 지정호 공이 난리를 피해 정착하였으며 그 당시 매화나무가 무척 많아 그것을 꺾어 집을 짓기 시작하여 지매(支梅)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옥천문화원]
자는 악지岳只, 다른 이름은 지석우 池碩愚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동 이면 우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 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풍족하지 못한 집안을 꾸려갔으나, 어머니를 불편함 이 없도록 모셨다. 어머니가 연로하 여 거동이 불편해지자 손발 노릇을 다하였다. 병들어 계시는 노모를 위 해 추운 겨울 금강에 나가 얼음을 깨 고 물고기를 잡아 봉양을 하고, 사시 사철 산과 들로 몸에 좋은 약초를 찾 아다니며 정성을 다해 모셨다. 그러 던 중 1727년(영조 3) 2월 17일 화전을 일구어 보리밭을 매고 있는데 갑자기 동네 쪽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일손 을 멈추고 달려와 보니, 그의 집이 불 길에 휩싸여 있었다. 문득 집에 어머 니가 계신 것이 떠올라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겨우 어머니를 업고 나왔으나 전신이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 일을 주위 의 유생들이 관청과 병영에 알렸으며, 1781년(정조 5)에 효자로 급복(給復: 복호를 주는 일. 복호는 충신·효자와 기타 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나 그 밖의 국가적 부담을 면제하여 주는 일)되었다. 현재 동이면 우산리 지매마을 앞에 정려문이 세워져 있으며, 그 안에는 ‘효자충주지공 아지정려비孝子忠州池公阿只旌閭碑’가 있다. 효자비에는 기존의 정려문이 많이 훼손되어 1983 년 5월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학생공정려기學生公旌閭記’ 편액이 걸려 있어 지아 지의 효행을 알려 주고 있다. [참고문헌] 『옥천군지』(1994), 정려문 內 학생공정려기(學生公旌閭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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