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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답양리 가산사(安內面 畓陽里 佳山寺)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안내면 답양리 가산사(安內面 畓陽里 佳山寺)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10. 27. 09:12

 

 

 

가산사는 안내면 답양리 채운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에 속해 있는 말사이다. 이 절의 역사에 대한 조선 중기 이전의 기록은 현 재 전해지지 않으나, 사찰의 주변에서 고려시대의 기와편들이 확인되고 있어 그 역사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 준다. 다만 사찰측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신라 성덕왕 19년인 720년에 창건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영규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가산사라는 이름은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승군장僧軍將으로 활약했던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 ?~1592) 가 이 가산사를 기지로 삼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더불어 왜구와 대적하였던 사실이 있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가산사가 창건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1799년(정조 23) 왕명에 의 하여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군의 북쪽 2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라는 기록 이 있어 18세기 말에는 가산사가 잠시 폐허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 에 들어서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하여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사찰들을 선교양종 30 본사 중의 하나에 속하게 하였는데, 당시 가산사는 법주사의 산외 말사가 되어 용암 사와 더불어 옥천군을 대표하는 사찰로 인식되었다.

 

 

 

가산사 영정각입니다
가산사에 있는 산신각입니다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채운산(彩雲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창건된 사찰.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720년(성덕왕 19)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자는 미상이다. 그 뒤 작은 암자로서 명맥만을 유지해오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영규(靈圭)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전소되었다.1624년(인조 2) 다시 중건하여 극락전과 목불상(木佛像)을 조성하였고, 숙종 때에는 영규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서 이 절을 호국사찰로 지정하고 조헌(趙憲)과 영규 두 의병장의 영정을 그려서 극락전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8세기 무렵 한 때 폐사되었다가 곧 중건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법주사 산외 말사로 용암사와 더불어 옥천군의 대표적 사찰로 꼽혀왔다.그러나 1910년에 총독부에서 이들의 영정을 강탈해갔을 뿐 아니라, 불온사찰이라고 하여 탄압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34년 법당을 중수하였는데 그 내역을 기록한 「법당중수기」가 전해 온다. 그 뒤 1960년에 중수하였으며, 1985년 요사를 중수하고 법당 불상의 개금 불사를 한 뒤 이듬해 미륵입상을 조성하였다.

 

 

 

가산사 극락보전에 있는 삼존불입니다.

 

 

 

그러나 1992년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하여 극락전이 불에 탔으며, 이 때 1624년 중건시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도 소실되고 말았다. 1994년 현재의 극락전을 새로 지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산신각·진영각·요사채 등이 있다.이 중 극락전은 1624년의 중건 때 건립된 것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여래좌상과 후불탱화·신중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1992년 소실된 아미타여래좌상은 향나무로 만든 높이 90㎝의 불상으로, 1624년에 논산 쌍계사(雙溪寺) 북암(北庵)에서 조성하여 이 절로 옮겨온 것임이 복장기(腹藏記)에 의해서 밝혀졌다.

 

 

 

 

 

또, 복장유물로 《묘법연화경홍전서 妙法蓮華經弘傳序》 1권 등 총 6점의 문헌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1477년(성종 8) 화암사(花巖寺)에서 개판한 목판본 불경으로 서지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산신각도 1624년에 중건하였다. 극락전과 거의 같은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건물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산사(佳山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