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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면 고마리 충효각(沼壽面 叩馬里 忠孝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소수면 고마리 충효각(沼壽面 叩馬里 忠孝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7. 20. 16:47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에 있는 하양허씨들의 충효각이다. 괴산에서 음성방면으로 가다가 원남쪽으로 길을 접어 들면 처음으로 만나는 동네가 고마리이다. 고마리라는 동네의 지명이 참 이채롭다.원래는 고마이귀(叩馬而歸)라는 말에서 나온 명칭이다.고마리에는 하양허씨들이 대성이다. 고마리라는 지명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자 풀이로 ‘말(馬)을 잡아당긴다(叩)’란 의미의 ‘고마리’의 어원은 마을유래비에 잘 소개가 돼 있다.조선 단종 원년(1453년), 수양대군 이방원(세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이극관 등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결국은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당시 형조판서를 지낸 허후(許詡)는 계유정난이 잘못되었음을 간언하다 결국은 세조의 노여움을 사 게제도로 귀양 가던 도중 이곳 괴산 고마리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른다.이 후 허후의 아들 허조(許慥)는 단종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돼 자결을 하게 된다. 세조는 허조의 시신에 형을 집행했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인 허연령(許延齡), 허구령(許九齡)을 모두 참하였다.그러나 셋째아들인 허정(許精)은 당시 태어난 지 15일 밖에 되지 않아 15세 되는 해에 형을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어느덧 허정이 15세에 이르자 형을 집행하고자 하였으나 이때는 세조가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던 차라 그를 죽이지 않고 충청도 괴산으로 귀양 보내도록 했다.그리하여 이곳에 허정의 후예인 하양 허씨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정조는 허후(許詡)가 본래 청렴결백해 충성스러운 간언을 하여 미움을 받았을 뿐 그 정신은 중국 주(周)나라 백이(伯夷), 숙제(叔齊)에 버금간다고 하여 허후의 충정을 높이 칭송했다.

이에 충신의 충언을 뜻하는 고마이간(叩馬而諫)이라 하여 이곳이 고마리(叩馬里)라 하였다고 한다. 현지에선 ‘고말귀’라고 부르고 있다. 붙들 고(叩), 말 마(馬), 말 이을 이(而), 간언할 간(諫)이란 고미이간의 뜻을 직역하면 ‘말을 붙들고 임금께 간언하다’는 뜻이다.주(周)나라의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할 때 신하가 임금을 시해할 수 없다고 말고삐를 붙잡고 불가함을 간하다 결국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사자성어이다. 현재는 이들 허후 자손들의 충정을 기리는 ‘충효각’이 이곳에 세워져 있고 마을 뒷산은 백이, 숙제가 충절을 지킨 뜻을 이어받아 수양산이라 부르고 있어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아픈 역사의 한 조각을 알려주고 있다.
출처 : 충북메이커스(http://www.cbmakers.co.kr)

 

 

 

 

 

충효각안에는 하양허씨 문중에서 배출된 효자와 충신들의 정려문이 걸려있다.찾아간 날도 후손 누군가가 주위를 깨끗히 정돈하여 놓았는지 깔끔하니 보기가 좋았다.최근에 세워진 홍살문이 있고 논과밭 경계로 하양허씨 가문에서 배출된 두명의 충신과 다섯명의 효자의 정려문이 걸려있다

 

 

 

하양(河陽)은 경상북도 경산시(慶山市)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 초에는 하주(河州)라 불리며 995년(성종 14)에 자사(刺使)가 파견되었다.1018년(현종 9)에 하양(河陽)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현감을 두었고,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花城縣)으로 개칭하였다.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하양군(河陽郡)으로 바뀌었고, 1896년 경상북도로 이관했다.1914년 군면 폐합으로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하양읍으로 승격하였다.1995년 경산군과 경산시의 통합으로 경산시 하양읍이 되었다.

 

하양허씨(河陽許氏)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고려 때 호부낭장(戶部郞將)을 역임했으며 가락국(駕洛國)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하는데,말년(末年)에 하주자사(河州刺史)가 되어 하주(河州: 하양의 옛지명)에 정착하였다.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花城)으로 개관(改貫)하였다가 이후 하양(河陽)으로 바꾸었다.그의 손자 허작린(許綽麟)은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증손 허신(許愼)은 호부주사(戶部主事)·동정(同正) 등을 역임하며 가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충효각옆으로는 설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