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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면 덕유리 진주강문충효각(文義面 德留里 晋州姜門忠孝閣) 본문
덕유리는 문의면의 서부에 위치 하였던 마을로 동은 산덕리, 서는 현도면 하석리, 남은 신대리, 북은 품곡리와 접하고 있다. 마을 서쪽 구봉산(370미터)이 동사면 골짜기에 발달 한 마을로써 마을 북쪽 서사면에 내덕 마을이 있었고 내덕 동쪽 냇가에는 외덕 마을이 있었다. 외덕 동쪽 도로 건너에는 건너들이 있고 그 남쪽 산 기슭에 새말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생미들이 있다. 새말 서쪽 도로가에 광원 마을이 있고 광원 남쪽 곁에는 웅곡 마올이 있다. 그러나 대청댐 건셜로 인하여 1980년에 수몰되어 주민은 모두 타지로 전출되었다. 조선시대 부터 역이 있던 곳으로 역촌이 형성 되었고 교통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역을 관리하는 직원의 관사와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 가 발달한 마을로 주민의 생활수준이 높았던 지역이다.
자연마을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내덕(안덕유) : 덕음 안쪽에 있는 마을. 현재 대교 바로 담수된 곳으로 옛 역촌 마올로 대로에 속한 곳
- 외덕(배갈덕유) : 덕울 바깥쪽에 있는 마을. 내덕 동쪽 내건너에 었던 마을.
- 신촌(새말) : 황경재(서울가기 위해 통과하는 고개)에 촌락이 있었으나 갑오년 동학란으로 소실되어 곰실위 새말에 다시 부락을 형성한 마을. 뒤에는 월굴봉이 있고 수몰전 문의에서 신탄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마을입구 양옆에 오래된 돌탑이 남신탑과 여신탑이 있었으며 오래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수십주 있었다. 마을 앞에는 돌다리가 있었고 다리건너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 광원 : 곰실 북서쪽에 있던 마을. 역을 관리하고 손림을 유하게 하는 장소로 사용하던 곳. 문의대교에서 신탄진 방면 약 2km지점 도로아래 담수된 위치에 었던 마을. 큰 느티나무가 두주 있었다.
- 곰실 : 부락 형상이 곰의 발자국 모양과 같다해서 부른 지명. 현 대청댐 팔각정 앞 건너편 산 중턱에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 있던 마을. 산의 형세가 곰처럼 생겼다고도 한다.
이 충효각은 조선 중종 23년(1544)에 매곡(梅谷) 강서(姜瑞)의 효행을 기리어 정려한 효자각에, 숙종 38년(1712)에 임진왜란 때 경기도사(京畿都事)로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공(忠烈公)의 시호를 받은 그의 아들 사명정(沙明亭) 강수남姜壽男(1552-1592)을 합설하고, 순조 2년(1803)에 효행으로 교관(敎官)에 증직되고 나라에서 정려한 강수남의 6대손인 강응명(姜應明)을 복설한 진주 강씨 3인의 정려이다.
이 충효각은 본래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 가막동에 세웠었는데 1935년에 문의면 덕유리 광원마을로 옮겼다가 1980년에 대청댐공사로 수몰지역이 되자 다시 지금의 덕유리 산89번지로 옮겨 세웠다. 지금의 충효각은 1935년에 중건하고 1980년에 해체하여 이전복원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충신 강서, 효자 강수남·강응명 3인의 충효문 편액을 걸었다.
1537년(중종3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갑자기 당한 부친상에 예를 다하여, 자리 거적이 모두 닳아 없어질 때까지 시묘 살이를 하다가 여막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앞서 형 강우는 1517년(중종12)에 모친상을 치른 후 시묘 살이를 하다가 피를 토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에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544년(중종39)에 정려가 내려졌다. 이러한 사실은 스승 남명(南冥) 조식(曹植)이 쓴 묘표(墓表)와 창설(創雪) 권두경(權斗經)이 쓴 효문기(孝門記)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슬하에 아들로 충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강수남(姜壽男)을 두었다.
조선전기 예조좌랑, 병조정랑,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인수(仁叟). 강효정(姜孝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세응(姜世應)이고, 아버지는 진사 강숙(姜璹)이며, 어머니는 성수근(成守瑾)의 딸이다. 작은아버지인 진사 강서(姜瑞)에 입양되었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전적을 거쳐 예조·병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과 평양이 차례로 함락되자 경기도관찰사 심대(沈岱)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다.강수남은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서 군사에 관하여 배운 일이 없었지만, 오로지 충의의 마음으로써 국가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출전하기에 앞서 가족들을 불러놓고 이별을 고하고 죽은 뒤에 시체라도 찾게 하고자 붉은 실을 머리에 얽어매고 옷소매에는 이름을 기록하였다.그해 10월 군사를 움직여 한성을 탈환하려던 중 삭녕전투에서 야습을 받아 군사가 흩어졌으나 가노(家奴) 검산(檢山)과 끝까지 싸우다 함께 죽었다. 출전할 때 신표로 상투에 묶었던 붉은 실을 보고 겨우 머리만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뒤에 검산의 자손도 복호(復戶)되었고 선조가 제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이조참판을 추증하였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가증(加贈)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수남(姜壽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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