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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산성리 이천계묘갈(報恩邑 山城里 李天啓墓碣) 본문
이천계(李天啓)는 1507(중종 2)~1550(명종 5)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형백(亨伯), 호는 괴당(槐堂)이다. 처음 보은에 입향한 군기소감(軍器少監) 이사언 (李士彦)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이문중(李文忠), 아버지는 부장(部將) 이철권(李鐵拳),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영의정에 증직된 한증(韓曾)의 딸이다. 부인은 강진 김씨(康津金氏)로 김윤선(金潤璿)의 딸이다. 보은읍 이평리에서 출생 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영의정 한효원(韓效元)에게 배웠다. 1537년(중종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에 제수되어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거쳐 사서(司書)에 오르고, 병조와 호조의 좌랑(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이어서 특별히 검상(檢詳), 사인(舍人)에 제수되었으며, 경상도 어사로 나가 군읍을 순찰하고 조정에 들어와 다시 사인에 제수되었다. 1544년(중종 39)에 경상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어 나갔는데 이때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이 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고, 1545년에 다시 의정부 사인이 되었으며, 명종이 즉위하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옮겼다. 이때 이기(李芑)가 대사헌 최보한(崔輔漢)을 부추기어, 지평(持平) 이담(李湛) 의 죄를 논하자 그가 장령으로 있으면서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이기는 이천계를 포함하여 이황(李滉),권물(權勿),이담(李湛),정황(丁熿) 등의 죄가 김저(金䃴)와 같다고 모함하여 삭탈관직 시켰다. 또한 1547년(명종 2)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 등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나자 이기는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를 사사(賜死)하고, 이천계를 포함한 이언적, 소재 (蘇齋) 노수신(盧守愼) 등 29인을 귀양 보냈다. 이때 이천계는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다. 이후 1550년(명종 5) 어머니 한씨의 부음(訃音)을 듣고 음식을 끊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후로 17년 뒤인 1567년(선조 즉위년)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상소로 비로소 신원이 회복되었고, 1570년(선조 3)에는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1929년 후손들이 유림(儒林)들의 찬동을 받아 백봉사(栢峯祠)를 창건하고 제향(祭享) 하였다. 묘소는 보은읍 산성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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