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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동 유래(金川洞 由來)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금천동 유래(金川洞 由來)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7. 18. 15:04

 

금천동의 유래를 설명하는 조형물을 세워놓았습니다.

 

조선 후기 철종 때 한 나그네가 걸어서 한양을 가고 있었다. 청원의 쌀안[米院]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부지런히 걸어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 청주성 남문 밖 합수머리에 당도하였다. 개울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신을 벗고 발을 담갔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며칠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하였다. 발을 물에 담근 채 괴나리봇짐을 베고 누워 잠이 들었다. 새소리에 놀라 잠이 깨니 해가 서쪽 하늘에 걸려 있고, 까마귀 떼가 벌겋게 물든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언짢은 마음을 털어버리려고 머리를 흔든 뒤에 물속에서 발을 빼려고 물속을 보았다. 물에 잠긴 두 발은 곱고 하얀 모래가 덮여 있는데, 발밑 패인 곳에 거친 황금색 왕모래가 섞여 있었다. 그는 그게 금이 아닌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틀림없는 금이었다. 물속에서 사금(砂金)을 발견한 그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고, 근처 언덕의 흙과 돌을 파서 물에 일어 보니 많은 양의 금이 나왔다. 다시 몇 곳의 흙을 파서 일어 보니 모두 많은 양의 금이 섞여 있었다. 이 나그네는 한양 가기를 그만두고 이곳에 헛간과 같은 집을 짓고, 광부를 데리고 금을 캘 덕대를 구하여 금을 캐기 시작하였다. 금은 합수머리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목암산(牧岩山) 호암리[우암산(牛岩山)[338m] 명암리] 방면의 하천을 중심으로 많은 양이 매장되어 있었다. 그는 두더지처럼 들과 야산, 하천변을 일구어 많은 금을 캐냈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조선팔도에 흩어져 있던 많은 덕대들과 금쟁이들이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이 일대에는 객주와 술집, 밥집이 들어서게 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합수머리에서 명암리에 이르는 하천을 ‘금이 나오는 내’라는 뜻으로 ‘쇠내개울[金川]'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이 이름을 쓰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최신 채광기(採鑛機)를 가지고 몇 번인가 이곳 개울에서 채금(採金)하여 많은 금을 채취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에도 근처 사람들이 채금 작업을 하여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에 속하는 법정동. 사금을 캐냈다고 하여 쇠내개울, 쇠내 또는 금천이 되었다.  본래 청주군 동주내면(東州內面)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탑동리(塔洞里), 문외리(門外里), 구하리(九下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천리라 하고 사주면(四州面)에 편입되었다.

 

 

1920년 청주읍에 편입되면서 탑동과 금천동으로 분리 되었다. 청주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동쪽에 꽃산(花山)이 있고, 꽃산 남서쪽에 헌병대산(憲兵隊山)이 있다. 상당산성에서 발원하여 금천동을 지나 무심천으로 합류하는 명암천이 흐르고 있다.  동쪽은 용정동, 서쪽은 무심천(無心川)을 경계로 흥덕구 모충동, 남쪽은 영운동, 북쪽은 석교동, 탑동, 용담동과 각각 접하고 있다. 이 외에도 수영로, 새내길 등의 크고 작은 도로가 나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