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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관찰사 김제갑영세불망비(公山城 觀察使金悌甲永世不忘碑) 본문

전국방방곡곡/공주(公州)

공산성 관찰사 김제갑영세불망비(公山城 觀察使金悌甲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8. 2. 18:13

 

김제갑은 조선전기 정언, 층청도관찰사, 우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김언묵(金彦默)이고, 아버지는 진사 김석(金錫)이며, 어머니는 기형(奇逈)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의 정자(正字), 병조좌랑, 정언(正言)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 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부사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는데, 왜장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鴒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요새만을 믿고 따로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가,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966년에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하여 원주역 광장에 충렬비가 세워졌다. 1711년(숙종 37)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제갑(金悌甲))]

 
 

괴산에 있는 화암서원의 모습입니다.

 

 

 

공주 공산성 선정비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석의 상태등으로 보아 기존의 비석이 훼손 또는 망실되어 새로 비석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관찰사김공제갑영세불망비(觀察使金公悌甲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