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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관찰사 김소거사비(公山城 觀察使金素去思碑) 본문
공산성 입구 선정비중에 하나입니다. 지금의 비석은 기존의 비가 훼손 또는 망실되어 새로 만들었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김공소거사비(觀察使金公素去思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김 소는 1602년(선조 35)∼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이다.
증조부는 김석(金錫), 조부는 김인갑(金仁甲)이고, 부친은 김시열(金時說)이다. 외조부는 손녹경(孫祿慶)이고, 처부는 김안세(金安世)이다.
1630년(인조 8) 경오식년사마시(庚午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2등으로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가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1635년(인조 13) 을해알성문과(乙亥謁聖文科)에 병과(丙科) 1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1644년(인조 22)에 청나라 연경(燕京)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다.
1652년(효종 3) 영흥부사(永興府使)로 재직할 때 정평부사(定平府使) 김효건(金孝建), 경성판관(鏡城判官) 이성시(李聖時), 북청판관(北靑判官) 김이경(金以鏡) 등과 함께 무기 수리에 있어 태만했다는 이유로 병조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호조참의(戶曹參議)‧형조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황해도(黃海道)‧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의 관직을 지냈다.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한민족대백과사전]
사리면 사담리 김소묘(沙梨面 沙潭里 金素墓)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tistory.com)
관찰사의 임기는 360일로 정해져 있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충청도에임명된 관찰사를 사료에서 확인해보면 583명이다. 관찰사로 임명을 받고도 부임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실제 관직생활을 한 사람은 500명 정도가된다. 평균적으로 매년 한 명씩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것이다.500여 명의 인물 중 충청도 관찰사로 이름을 남긴 사람을 찾아보면 먼저충청감영 시대의 첫 관찰사 유근이 있다. 두 번씩이나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유근은 1602년(선조 35) 선조에게 감영을 설치하는 공문서를 올려 1603년(선조 36) 공주 목사를 겸직하라는 답을 받는다. 물론, 유근이 단독으로 충청감영공주 이전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앙정부는 이미 각 도의 감영을 한자리에 상주하게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유근은 부임하여공산성을 수리하여 다시 쌓고, 공북루(拱北樓)와 진남루(鎭南樓)를 세웠다.결국 유근이 수리한 충청감영은 1623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왔을 때 5박 6일간 머물렀을 때에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거동 할 때 머무는곳)로 사용되었다
또 송시열과 대립한 박세당(朴世堂, 1629~1703)도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박세당은 양반 가문 출신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곤궁한 환경에서 자랐다. 홀어머니 밑에서 원주·안동·천안 등지로 떠돌아다니다가 10세 때비로소 글을 배웠는데도 재주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가를 왕래하며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업을 계속했다.그는 당쟁의 시기에 소론계열로서 노론계의 송시열과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특히 박세당의 농학은 『농가집성(農家集成)』으로대표되는 주자학적인 사유체계와 지주제 중심의 농업·농학을 벗어나 소농층이위주가 되는 농업·농학을 수렴하고자 하였다.
자네집에 술익거든부디 나를 부르시오
내집의 꽃 피거든나도 자네 청하겠네
한평생 시름잊을 일을 의논하고자 한다.
이 글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대동법 실시를 건의한 김육(金堉,1580~1658)의 시이다. 관리가 한평생 시름 잊을 일이란 무엇이겠는가? 김육은관리생활을 하면서 오직 백성의 편안한 생활을 위하여 노력한 사람이다.김육은 관직에 있는 동안 줄곧 대동법 시행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자고주장하였다. 김육은 스스로‘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동법 이야기만 꺼내니 사람들이 웃을 만도 하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부친 이진휴(李震休, 1657~1710)도 충청도관찰사였다.
고을 이름을 공주라 한것은
고을 북쪽에작은 산 하나가 강가에서리고얽혀서,
모양이 공(公)자와 같은 산 때문이다.
산세를 따라서작은성을 쌓고 강을 해자(垓字)로 삼아,
지역은좁으나형세는견고하다.
이 글은 이중환의 『택리지』 중에서 공주와 공산성에 관한 것이다. 『택리지』는 1751년(영조 27)에 이중환이 저술한 인문지리서이자, 조선 후기 지리학의 발달을 대표하는 실학 지리서이다. 이진휴 관찰사보다 이중환이 우리에게더 알려져 있지만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이중환이 태어난 것이다. 이중환의 고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공주시 사송정이라는 설이 있다. 이중환이12세 되던 해에 이진휴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다.택리지 속에 담긴 이중환의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의 성장과정과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주와 공산성에 대해서 자세히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이진휴가 관찰사로 근무할 때 공주 지역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말의 친일파 박제순도 충청도 관찰사(1894)를 지냈다. 충청도 관찰사로재직할 때, 일본군 및 정부군으로 이루어진 경군(京軍)과 연합하여 동학농민군토벌작전을 수행하여‘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박제순은 1905년 당시 외부대신(外部大臣)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을사오적이다. 아쉽게도 관찰사 박제순의 거사비가 이인행정복지센터 앞에 버젓이 서 있다.[2021 공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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