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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관찰사김억령영세불망비(公山城 觀察使金億齡永世不忘碑) 본문

전국방방곡곡/공주(公州)

공산성 관찰사김억령영세불망비(公山城 觀察使金億齡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8. 3. 08:42

 


공주 공산성입구에 서있는 선정비군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조 충청관찰사를 지낸 김억령의 영세불망비 입니다.공산성 입구에 그동안 공주원근에 산재되어 있던 공적비등을 한군데로 모아서 세워 놓았습니다. 김억령의 비석은 훼손 또는 망실이 되어 새로 만들어 세워놓았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김공억령영세불망비(觀察使金公億齡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김억령은 1529년(중종 24)~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중로(仲老)‧중구(仲耉)이다. 본관은 안동(安東[舊])이다.

증조부는 세조 때의 공신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참여한 김질(金礩)이고, 조부는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지낸 김성동(金誠童)이며, 부친은 김언(金漹)이다. 외증조부는 세조의 문신이자 『衿陽雜錄(금양잡록)』의 저자인 강희맹(姜希孟)이다. 처부는 이숙(李淑)이다.

1546년(명종 1) 식년 진사시에 3등 35위로 입격하였고, 1552년(명종 7) 식년시에 병과 14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1558년(명종 13)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임명된 이래로 명종 대에는 주로 삼사의 간관으로 활동하였다. 1562년(명종 17) 원계검(元繼儉)이 뇌물을 받는 등 벼슬과 관련하여 부정하다는 간언이 김억령(金億齡)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봉산군수(鳳山郡守)로 내려가게 되었다. 2년 뒤에 다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삼사의 관직에 지속적으로 임명되었다.

선조 즉위 이후에는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재직하면서 1553년(명종 8)의 군적(軍籍)의 잘못된 점을 살펴 군역을 지지 않은 자들을 새로 수괄하여 정군(正軍)에 보충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후 충청감사(忠淸監司)‧형조참의(刑曹參議)‧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냈으나, 광주목사 시절 술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