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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도순찰사 민영상영세불망비(公山城 都巡察使 閔泳商永世不忘碑) 본문

전국방방곡곡/공주(公州)

공산성 도순찰사 민영상영세불망비(公山城 都巡察使 閔泳商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8. 5. 08:13

 

민영상은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경(伊卿). 민이현(閔彛顯)의 증손이며 민정용(閔正鏞)의 아들이다. 외조부는 권제형(權躋亨)이다.

1872년(고종 9) 문과에 합격하였다. 1878년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885년(고종 22) 8월에는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형조판서를 지냈다. 1886년 3월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1889년 3월까지 재임하였다.

그 해 4월 예문관제학, 6월 한성부판윤을 차례로 역임하고, 7월에는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90년에는 홍문관제학이 되었고, 그 해 11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 후 시강원좌빈객,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94년 7월에는 내무아문대신(內務衙門大臣)에 임명되었다.

1897년에는 품계가 정일품(正一品)에 이르렀다. 1899년에는 궁내부특진관 칙임1등관이 되었다. 민영상의 아들 민종식(閔宗植)은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8월에 문헌(文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다음백과]

 

 

공산성 입구 선정비군에 자리하고 있으며 비석의 전면에는 도순찰사민공영상영세불망비(都巡察使閔公泳商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도순찰사(都巡察使)는 고려시대는 우왕 때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라는 것이 있어 왜구의 창궐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 도에 1인씩 재상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도체찰사(都體察使)·도순찰사의 구분이 있어 정1품 재상은 도체찰사, 종1품 재상은 체찰사, 정2품 재상은 도순찰사, 종2품 재상은 순찰사로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세조 때 이 구분을 없애어 도순찰사·순찰사로 일원화하였다.

그러나 1488년(성종 19) 9월 명호에 등차가 없어 불편하다고 하여 다시 구제로 환원하였다. 『속대전』에 의하면, 재상으로서 군무(軍務)를 받으러 사신으로 나간 자가 의정이면 도체찰사, 종1품 이하면 도순찰사, 종2품이면 순찰사, 종3품이면 찰리사(察理使)라 하였다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도순찰사 [都巡察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영상은 1887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888년 임기가 다 되었어도 사람들이 연임을 요구하여 잉임하였다. 이 해에 큰 흉년이 들자 군포대납문제를 처리하고 수령교체를 금하도록 요청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사창 환자곡중에서 획급하여 구제하도록 하였다. 비석의 건힙시기는 광서14년 무자년 여름(1888년)입니다.[공주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