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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면온천리석탑(水安堡面溫泉里石塔)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수안보면온천리석탑(水安堡面溫泉里石塔)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1. 14. 19:49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에 있는 고려 후기 석탑.

[개설]
온천리 석탑은 일제강점기 때 탑동마을에 있었던 소위 대사리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하고 있다. 원위치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인 1943년경 일본인 주재소장이 현위치로 옮겨 매립한 후 밀반출을 하려다가 1945년 광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3년경 매립된 지역에서 발굴하여 온천리 파출소에 세웠다고 한다.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온천리 일대의 불교 문화 양상을 알 수 있는 석탑이다.

[건립경위]
석탑은 사찰 가람의 중심에 세워져 종교 활동의 중심적인 대상이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표식(標式)이나 비보적(裨補的)인 성격으로 사찰이 아닌 곳에 세워지기도 한다. 온천리 석탑은 원위치는 알 수 없지만, 작은 규모의 사찰에 세워져 예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 파출소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탑동마을회관앞으로 이건하였다. 전체적으로 결실된 부재가 많은 석탑이다.

[형태]
온천리 석탑은 많은 부재가 결실되어 있는 상태이다. 현재 석탑의 기단부에 활용되었던 2매와 3매의 옥개석 등이 남아 있다. 바닥에 놓인 부재는 상면에 면석(面石)을 받치기 위한 괴임대가 면석 하부와 잘 맞는 것으로 보아, 기단부 면석을 받치는 지대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면석부는 좌우에 약하게 우주를 표현하였다. 우주의 표현 기법이 간략화된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어, 형식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1층 탑신석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은 하부 모든 층이 하부에 3단의 받침을 마련하였는데 낮게 치석하였다. 처마부는 두툼하게 하여 둔중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낙수면은 좌우 너비가 좁아 급경사를 이루면서 처마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합각부는 뾰족하게 치석하였으며, 마루 끝에는 약하게 반전(反轉)을 주었다. 옥개석과 상층의 탑신석을 동일석으로 치석하여 고려시대 소형 석탑의 일반적인 수법이 적용되었다.

특히 3층 옥개석은 다른 층에 비하여 처마부를 높이 들어 올렸으며, 전각(轉角)의 반전도 높게 처리하여 다른 층과 약간 다른 치석 수법이 채용되었다. 3층 옥개석 상부에는 동일석으로 마련된 사각형 대석이 있는데, 좌우에 일정한 너비의 돋을대가 있고 상부에도 좌우로 돋을대가 있어 탑신석이기보다는 노반으로 활용된 부재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3층 옥개석 위에 곧바로 상륜부가 올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원통형 석재들이 올려져 있는데, 석탑에 결구되었던 부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현황]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 탑동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구체적인 층수는 알 수 없지만 3층일 가능성이 높은 석탑이다. 작은 규모의 석탑으로 건립되었으며, 기단부가 간략하게 결구된 석탑이었다. 옥개석의 치석 수법이 약간 다른 점이 의문점이다. 이것은 다른 석탑 부재가 올려졌거나, 후대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치석 수법이 다른 옥개석이 올려졌을 가능성 등 여러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온천리 석탑은 비록 작은 규모의 석탑으로 형식화가 강하게 진전된 고려 후기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이 온천리 일대에서 출토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고려시대 이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 사찰에 석탑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온천리 지역은 충주에서 월악산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기도 했기에, 이 석탑이 세워져 있었던 사찰은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에게 숙식이나 여행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곳이었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