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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평면 용정리 완위각지(草坪面 龍亭里 宛委閣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초평면 용정리 완위각지(草坪面 龍亭里 宛委閣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10. 26. 08:13

 

계절의 변화는 어김이 없다.한 낮으론 덥다고 힘들어 했던 때가 어제 같은데 밭에 배추들은 알알히 살을 찌우고 있다. 양촌마을은 이시발과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있다. 쌍오비각과 더불어 강가에 위치한 정자인 쌍오각터와 청령대라는 각자가 있다. 쌍오정터야 그렇타 하고 암벽에 새긴 청령대 각자를 보려고 또 방문했는데....접근할 방법이 없다. 겨울이 되여 냇물이 얼면 그때나 방문하여 볼수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草坪面 龍亭里 陽村마을) (tistory.com)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草坪面 龍亭里 陽村마을)

용정리 양촌마을은 초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국도 34호선을 따라가거나 초평천 건너 지전마을을 통하여 갈 수 있다. . 관련 유적으로 지전마을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인 진천 이시발

king6113.tistory.com

 

 

지금의 농촌의 현실일까?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늘어나며 곳곳히 스러지는 빈집들이 많다.

 

 

완위각터는 양지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양지마을 마을회관을 바라보며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완위각터는 조선후기의 문신인 이하곤의 집터이며 장서각인 만권루가 있던곳이다.그나마 몇 해 전까지는 건물이 서있었지만 2020년경 있던 건물마저 허물어지고 텅빈 공간에 흐트러진 초석들만 나뒹굴고 있다.

 

 

이하곤(李夏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이하곤(李夏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재대(載大), 호는 담헌(澹軒) 또는 계림(鷄林).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손자이며, 당시 문형(文衡)이었던 이인엽(李寅燁)의 맏아들이다.

encykorea.aks.ac.kr

 

 

http://jincheon.grandculture.net/jincheon/search/GC02700517?keyword=%EC%99%84%EC%9C%84%EA%B0%81&page=1#self 

 

완위각 터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조선 후기 문인화가 이하곤의 고택이 있던 터. [개설] 완위각(宛委閣) 터는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에 위치하며,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이며 장서

jincheon.grandculture.net

 

 

집을 지탱하고 있던 초석들과 함께 돌확등이 흘러간 세월의 아픔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주춧돌과 함께 집을 이루고 있던 목재들이 한켠에 쌓여있다. 세월속으로 건물은 사라지고 흐르는 이야기만 촌노들의 입을 통하여 구전되고 있다. 아직도 관의 손길은 있는지 제초는 깨끗히 해놓았다. 이 곳에서 만난 마을이장님은 동네를 위한 여러가지 구상과 더불어 살기좋은 마을을 만들기위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다. 진심으로 마을을 위하는 이장님 이시다.

 

 

진천 완위각지 발굴(시굴)조사 자료. (tistory.com)

 

진천 완위각지 발굴(시굴)조사 자료.

2009. 7. 1(수) ■ 진천 완위각지 발굴(시굴)조사 鎭川 完委閣址 發屈(試掘)調査 -지도위원회의 자료- [자료출처] 한국문화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 [소재지]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양촌길 12-15(용정

009448.tistory.com

 

이하곤은 이인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재대載大, 호는 담헌澹軒)이다. 1708년(숙 종 30) 3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장원하여, 1713년 세마洗馬, 부솔副率에 임명되었으나 나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하곤이 일찍부터 관직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은 복잡한 사연이 있다. 당시에는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당하여 갈등의 골이 깊어가던 때였다. 먼저 노론 성향의 인사들과 학맥·혼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하곤의 학문적 뿌리는 노론의 중심에 있던 김창협金昌協과 김창흡金昌翕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우암 송시열의 제자였던 송상기宋相琦(1687-1723)의 사위였다. 부인 은진송씨(1678-1742)는 송규렴宋奎濂(1630-1709)의 손녀요, 송상기의 딸이다.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송규렴의 처남이었고,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金昌協(1651 1708)은 이하곤의 스승이었다. 김창협과 송상기는 외고종간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1723년(경종 4) 김홍석金弘錫이 스승 김창협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어유붕魚有鵬등과 상소를 올려 구원하면서 소론의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출사를 포기하고 초평으로 낙향하였다. 하지만 이미 부친 이인엽에 이르러 이 가문은 점차 소론계로 분류되기 시작하였다. 이하곤의 고모부인 최석정은 점차 소론의 영수로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초평의 완위각 편액 은 윤순尹淳이 쓰고, 그의 제자였던 이광사李匡師는 완위각의 다른 이름인 만권루의 편액을 썼다. 모두 소론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이하곤은 노·소론의 폭넓은 인맥을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당쟁이 심화되면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후광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폭넓은 인사와의 교류는 그의 서화 수집이 가능한 배경이었으며, 여러 인사와의 교류 또한 당색에 제한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남겨진 시문집으로는 『두타초頭陀草』와 『담험집』, 『선세유사先世遺事』 등이 있다. 완위각은 연표 등을 고려할 때 1711년(숙종 37)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하곤은 이해 진천 금계金溪로 낙향하여 할아버지 이시발이 마련한 터전에 서적을 비치하여 만권루萬卷樓라 일컬었다. 완위각의 명칭은 우禹임금이 금간옥자金簡玉字의 글을 얻었다는 산 이름, 완위산에서 유래한다. 이 산은 회계현會稽縣동남쪽 15리에 있는데, 달리 옥사산玉笥山이라 한다. 이후 이 산에 오르면 귀중한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면서, 완위각에서도 금간옥자와 같은 귀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라 한다. 한편 익재 이제현의 활동에서 보이듯 만권당의 존재는 완위각의 별칭으로 만권루라 하였다. 완위각과 만권루의 글씨는 당대 이하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이광사와 윤순 사제의 친필이 종손가에 전하고 있다. 완위각이 마련된 뒤 이곳은 소론들의 집합처였다. 완위각의 편액을 쓴 윤순은 이하곤과 함께 속리산을 다녀오기도 하고 윤순의 형인 윤유尹游(1674-1737)가 진천현감에 부임하면서 자연스레 초평을 방문할 수 있었다. 완위각의 서적은 천질이라는 윤순의 시구나 상아첨 만축서를 부러워한 심육沈錥(1685-1753)의 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윤순과 심육은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으로, 특히 심육은 이종성李宗城등과 함께 준론에 속했다. 게다가 최석정의 아들인 최창대崔昌大와의 긴밀한 교유로 보아 당대 소론계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하곤이 완성한 완위각은 적어도 그의 손자 이집두李集斗때까지는 그대로 유지된 듯하다. 이집두가 진천현감이 되어 아버지를 모시자 이충익李忠翊(1744-1816)과 주고받은 시에 도 장서의 풍부함과 임기 후 선대의 유업을 지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19세기 말 이유원李裕元의 기록 속에 100년을 전해오던 장서가 모두 산일散逸되고 숙종 이전 명현의 문집만 남아있다고 하여 이즈음 크게 훼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1922년 정인표 鄭寅杓의 시에 당시까지도 상당한 장서가 유지되고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후손 이봉우李鳳雨가 2,000여 책을 수집하여 청주 북일면에 만권당萬 卷堂을 세워 보존하다가, 또 도난당하였다. 현재 종손가에 전하는 서적은 700책 정도이고 그 대부분 중국서적이다. 완위각은 만권루로 불릴 만큼 다량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산일되었다. 또한 이하곤이 소장 서목을 밝히지 않아 정확한 소장 내역을 알 수 없다. 현재 종손가에 보관 중인 서책은 모두 241종으로 이중 중국본이 200종, 우리 것이 41종 이다. 소장 서책의 권책은 현재 경부經部319권 11책 1첩, 사부史部29권 91책, 자부子部798 권 240책, 집부集部744권 278책 등 2,155권 726책 3첩이 전한다. 초평의 완위각은 월사 ‘이정귀의 고택’, 안산 ‘류명천의 청문당’, ‘류명현의 경성당’과 함 께 당시 4대 장서각으로 꼽힐 정도로, 일만 여권의 서책이 소장된 18세기 조선의 도서관 역할을 해 왔던 곳이다. 완위각을 드나들던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은 소론계 명사로서 강화학파江華學派 라는 공통점이 있다. 완위각은 건립 당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강화학파의 문화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한말을 지나 홍승헌洪承憲·정원하鄭元夏·정인표·정은조鄭誾朝· 정인보鄭寅普부자·이상설李相卨등이 대거 초평으로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