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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소이면 비석거리 본문
조선조 충주목사였던 엄찬과 이국헌의 비석입니다.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이 거리의 지명이 비선거리가 되었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이채의 비석이라고 칭한것이 이국헌의 비석입니다. 비석에 솔질 한번 하면 이름을 알수 있을텐데 누군가가 맨처음에 이채의 비석이라고 하니 확인도 없이 너도나도 이채의 비석이라고 하는거지요. 이국헌이 육방관속들에게 의문을 죽음을 당하자 그 후임으로 충주목사로 부임한 사람이 엄찬입니다. 엄찬이 부임하며 이국헌의 아들과 사이가 안좋아 엄찬의 곤장을 맞고 이국헌의 아들이 죽었지요. 결국 저 비석은 서로의 원수지간(?)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소이면 비산리 충주목사이국헌선정비(蘇伊面 碑山里 忠州牧使李國憲善政碑) (tistory.com)
이명희 할아버지(73세)는 비산1리가 비석거리로 불리게 된 유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비석은 현재, 비석거리 입구에 마을 보호수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부식이 되어서 비석에 쓰인 정확한 이름조차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비석이 있는 위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는 비산리 1구인데 자연부락명은 비석부락. 저…, 저기 저 비석 때문이지. 그러니까 그거야 확실히 모르는데 저게 충주목사비인데 여기가 시방은 음성군이지만 이조 말기 군 개편되기 전에는 충주목에 속했다고, 그래서 충주목사비인데 하나는 엄목사고 하나는 이목사여. 우리가 그전에 비를 닦아서 보는데 엄목사는 이름이 확실히 나와. 엄참반. 그리고 이목사는 이공이라는 것만 알지, 이름자가 뭉개져서 이 목사라는 것만 알고.”그러나 이 비석에 대한 조사자료를 통하여 비석의 주인공 및 시대를 비정해 보면 엄목사비는 「목사 엄찬 진혜휼선비(牧使嚴讚賑惠恤善碑)」로 엄찬은 조선 숙종 20~21년 충주목사를 지냈다. 그리고 이 목사비는 「목사 이채청○○비(牧使 李采淸○○碑)」로 이채는 조선 순조 2~8년 충주목사를 지냈다.비석은 충주목사가 행정을 잘해서 송덕비를 만든 것이며 교통의 길목인 비산리에 세워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비석이 세워졌던 위치는 비산1리가 비석거리라고 불리며 옛 교통의 길목이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서울, 원주, 경상도 등으로 통하는 네거리 중심에 엄목사와 이목사의 공을 인정하여 당시 충주목이었던 비산1리에 목사비를 세운 것이 인연이 되어 비산1리는 비석거리라고 불리며 사방으로 교통이 발달되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전에는 마을이 매우 번성했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글쎄. 그것까지는 옛날에 충주목사로서 참 행정을 잘했다는 의미에서 송덕비라구 그게. 목사의 송덕비야. 그래서 이 동네가 비석부락이라고, 비산리라고 그 인연에서 비석부락이 된 거지. 예전에 신작로가 나기 전에는 저 위에서 내려오는 길이 옛날 도로여, 그래서 거가 네거리라고. 여기서 올라가면 음성으로 해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고 동쪽으로 가면 충주로 해서 원주로 나가는 길이고 앞으로 가면 괴산으로 해서 경상도로 내려가는 길이고 저리 올라가면 신니면으로 강원도 원주로 사뭇 나가는 네거리리라고. 그래서 예전 길에 네거리에다가 세운 거야. 느티나무가 또 있는데 몇 백 년 된 느티나무 옆에다가 비를 세우고, 네거리에다가 비를 세운 연유로 해서 비산리 비석부락이라고 한 거지.”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보았던 번성했던 주막들을 떠올리며 옛날 비석거리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다. 예전엔 비석거리가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타지 사람들도 많이 오고가던 시전이 형성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비석을 매우 크게 묘사해 주던 할아버지의 이야기와는 달라 이명희 할아버지(83세)께 다시 찾아가 비석에 대해 물어 보았다. 할아버지는 원래의 비석은 큰 것인데 마을 정비를 하면서 땅 아래로 묻은 것이라고 하였다. 땅 위에 올라와 있는 것보다 땅 아래 있는 것이 더 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입이 벌어졌다.“그 밑에 기석이 비석 세운 밑에 묻힌 게 하여간 한 길은 돼. 그전에 우리가 한번 비석을 옮기려고 파보니까 여간해서 끝도 안보이고 그 바탕 위에다가 비를 세운 건데 그 위에도 높이가 1m 가까이 될 거야 아마. 두께도 여간 두꺼워. 길에 방해가 돼서 좀 옮겨 보려고 한번 시도를 해 봤지. 그런데 도저히 안 되고 그냥 파묻고 말았지.”라고 말해주었다. 지상위로 나와 있는 비석의 크기는 약 1m 20㎝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직접 파서 밑에 있는 기석을 보았다고 하며 비석의 크기는 약 2m 정도가 될 거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만큼 비산리의 비석은 오래 전부터 마을에 깊게 박혀 마을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하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예전에는 신작로 새로 나고 주막을 다 뜯어 치웠지만 주막이 있었고 여인숙도 댓집 있었고. 예전에는 마차로 다 운반해서 마차가 많이 댕겨서 마방간도 있어서 마차가 서서 자고 소도 먹이고 해서 사람도 자고 동물도 자는 데가 있었고 여인숙, 숙박집 사뭇 올려서 많았고 사람들도 많이 다녔었어. 여기가 교통 요지였었지 우리 어릴 때는. 근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해지고 기차도 다니고 차도 많이 다니고 나서는 여인숙 같은 게 불필요하잖아. 그래서 자동적으로 없어지게 된 거지.”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는 비석이 궁금하여 마을입구로 가니 느티나무 아래 1m 정도 크기의 비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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