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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면 동화사석조비로사나불좌상(東華寺石造毘盧舍那佛坐像) 본문

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남이면 동화사석조비로사나불좌상(東華寺石造毘盧舍那佛坐像)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4. 8. 19:32

 

 

 

 

 

 

 

 

속칭 "남수원절" 이라 불리는 동화사(東華寺)의 대웅전 안에 주존으로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 광배(光背)를 잃고 있을 뿐 거의 완형에 가깝다. 높은 대좌(臺座)위에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목이 부러져 있던 것을 복원하여 놓았는데 잘못 복원하여 불두(佛頭)가 오른쪽으로 약간 돌려져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낮은 육계가 있으나 뚜렷하지 않으며, 얼굴 모습은 마멸된데다가 전신에 金粉을 칠하여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다. 수인(手印)은 마멸로 뚜렷하지 않으나 오른손을 아래로 하고 왼손을 위로 하여 가지런히 모은 점으로 미루어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로써 이 불상은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로 확인되고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양어깨로부터 흘러 가슴앞에서 U자형을 이루면서 좌우 대칭으로 처리되어 무릎을 감싸고 있는데 의문(衣紋)은 도식화되었다.

불상의 대좌는 상대석(上臺石)의 일부가 깨지기는 하였으나 완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하대석 이하는 마룻장 밑으로 들어가 있으나 마루 일부를 뜯고 보면 방형의 지대석(地臺石)과 8각형의 기대석(基臺石)이 놓여 있다. 기대석의 8면에는 안상(眼象)을 마련하고 그 안에 사자상(獅子像)을 높게 부조하였다.

중대석은 8각으로 정면에 향로를 조각하고 나머지 7면에는 합장상(合掌像), 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여래상(如來像)등 각기 다른 모습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을 배치하였으나 현재 중대석은 전후면이 뒤바뀌게 놓여져 있다.

상대석은 원형(圓形)으로 아래 면에 각형부연(角形副椽)이 마련되었고, 측면에 앙련화문(仰蓮花紋)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나말려초(羅末麗初)로 추정되며, 실측치는 불상 높이 148cm, 머리 높이 51cm, 어깨높이 91cm, 어깨폭 70cm, 가슴 폭 45cm, 무릎 높이 28cm, 무릎 폭 109cm이며, 대좌는 중대석 높이 31.5cm, 상대석 높이 19cm, 상대석 지름 117cm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기 왜군의 한 왜장이 청주지역을 지나가다가 멀리 동화산 지역에서 황금빛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곳에 분명 보물이 묻혀있을 것으로 확신한 왜장은 부하들을 데리고 이곳 동화산에 다다랐다. 그 무렵 동화산에 자리잡고 있는 동화사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내의 석불좌상에서 몸에 땀이 맺히고 법당 안에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사찰의 모든 사람들이 불길한 징조라고 걱정하고 있을 때 이곳에 왜병이 들이닥쳤다. 왜장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금빛이 나는 법당문을 열었다. 그러자 화려한 빛을 내던 불상에서 빛이 사리지고 불상의 얼굴이 서서히 돌아가 왜장을 외면하였다. 화가 난 왜장은 칼을 들어 불상의 목을 내리쳤다. 그런데 그 불상의 목이 떨어지면서 왜장의 발목을 내리찍는 것이다. 이에 놀란 왜군들은 황급히 발목이 부러진 왜장을 불당에서 끌어내어 고분터로 몸을 피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 천둥, 번개와 더불어 소나무가 내리기 시작했다. 왜병들은 무서워 벌벌 떨며 커다란 고목나무 밑으로 몸을 피했는데 갑자기 이 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 나무 밑에 몸을 피했던 대부분의 왜병들은 이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왜병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 국사봉에 은신하고 있던 조헌장군께서 군사를 이끌어 이들을 몰살시켜 버렸다고 한다. 이후 떨어진 석불의 머리를 다시 그 자리에 올려붙였으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현재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

흔히 우리나라의 불교를 호국불교라고 한다. 부처님의 자비를 온 세상에 실천하면서도 나라가 어려울 때는 그때마다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기도 했다. 이런 호국불교의 모습이 고스란히 살아 전해져오는 곳이 이 동화사 뿐만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