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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화양동 비례부동각자 옆 각자(靑川面 華陽洞 非禮不動刻字 옆 刻字)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천면 화양동 비례부동각자 옆 각자(靑川面 華陽洞 非禮不動刻字 옆 刻字)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3. 9. 3. 13:28

 

화양구곡의 5곡인 첨성대 밑의 냇가의 암벽에 각자되어 있는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각자옆에 새겨진 각자로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각자를 새기게 된 이유를 각자한 내용입니다.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어필로,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 입니다. 비례부동의 오른쪽에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습니다

 

 

 

陪臣閔鼎重奉至 與宋時烈等謹拜手 稽首摸勒時四十七年甲寅四月日也

(배신민정중봉지 여송시열등근배수 괴수모륵시사십칠년갑인사월일야)

<배신 민정중이 받들고 와서 송시열 등과 함께 삼가 공손히 절을 하고 본떠 새기니 때는 47년 갑인 4월 일이다.>

배신陪臣이라 함은 신하의 신하. 곧 제후의 신하. 제후의 신하인 대부(大夫)가 천자를 대할 때의 자칭하는 말입니다.

47년은 숭정47년을 말하는 것으로 1627년 숭정1년을 기준하면 1674년, 갑인년 입니다. 비례부동은 송시열이 1674년 4월에 직접 새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어필을 가지고 온 민정중(1628. 1. ~ 1692. 6. 25.)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조부는 경주부윤 민기(閔機)이고, 부친은 강원도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이며, 모친은 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형 민기중(閔蓍重)과 동생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과 3명의 여동생이 있으며, 승지 홍처윤(洪處尹)의 딸 사이에 아들 민진장(閔鎭長)을 두었다.

1649년 정시문과에 장원하였으며, 전라도 · 충청도 · 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이조 · 공조 · 호조 ·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75년 남인이 득세하자 서인으로서 1679년 장흥부(長興府)에 유배되었다가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나왔다. 이후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을 역임했다. 1682년 청나라 강희제가 심양(瀋陽)에 오자 문안사(問安使)로 다녀왔다. 1689년 기사환국 때 남인이 다시 득세하자 벽동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송시열 · 송준길 · 권상하 등과 교유하였으며 서풍도 이들과 유관하다.

현존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비문으로 1663년 <유무증묘갈(兪懋曾墓碣)>을 들 수 있다. 단정한 짜임에 필획의 굵기가 비교적 일정하여 당시 양송체의 웅건 · 장중함보다 질박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688년 여주 <정익공이완신도비(貞翼公李浣神道碑)>는 자형이 방정하며 획이 가늘어졌고 균일한 굵기가 부드러우면서도 담박한 노년의 필치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자형과 운필, 획법이 <정익공이완신도비>의 비문과 유사해 50세 전후의 서풍을 보여준다.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근묵』의 <행서서간>이나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초서간찰>, 『명가필보』 게재의 <초서간찰>은 송준길의 호방하면서도 엄격한 필의가 엿보인다. 그 밖에 <개성부유수민심언표(開城副留守閔審言表)>나 <개심사대웅전편액(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의 작품이 전한다. 저서로 『노봉집(老峯集)』, 『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 『임진유문(壬辰遺聞)』이 있다.[閔鼎重]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