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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운암리관란정(米院面 雲岩里觀瀾亭)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운암리관란정(米院面 雲岩里觀瀾亭)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5. 1. 09:34

 

1926년에 비서승 송재 송병이(秘書丞 松齋 宋秉彛, 1866~1934년)가 미원면 운암리송호마을 개울가에 세운 정자이다. 지금의 정자는 1963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안에는 1926년에 조병집이 쓴 <관란정기(觀瀾亭記)>가 걸려있으며 밖에는추강 양만기(秋江 梁萬基)가 쓰고 송동헌(宋東憲)이 각자한 ‘관란정(觀瀾亭)’ 현판이 있다.

 

 

 

 

 

<觀瀾亭記>
松湖宋氏之村也 左右峰巒 皆可陟降 深不至僻 淺不至露 土沃田良 禾麻之趣自足 所謂山中之野者非耶 有兩水合於前 四時㶁㶁鳴 自北來者 四十里 上黨出也 自南來 五十里
俗離出也 湖之口 岩石奇絶 見之者莫不稱美 歲丙寅 湖之士宋松齋 用其表德 乃亭之 則名園水石 始得主人焉 名以觀瀾 朝夕登臨 輒欣然忘歸 以余知其事 請爲記 余與松齋 氣
味相合 居又密邇 苦甘歡戚 無不共之 其可以不文辭諸 嘗聞雙淸堂 隱德不仕 鄕人高其風誼 三杞公 仁厚恭儉 以學行聞道 松齋承襲不墜 與時晦息 囂囂林泉 無慕於外 眞可謂肖 孫矣 朱子釋孟子觀瀾之說曰 觀水之瀾 則知道之有本矣 松齋之取斯 豈徒然哉 夫善言理者 先言氣 善言體者 先言用 苟由其末而推其本 因其流而泝其源 何物之不可測 何事之不可會哉 且也 瀾者水之湍急處也 世路之危險 人心之翻覆 皆瀾之類也 善觀而愼處之 坦然公正 所遇裕如此 一帶之水 浩浩如深淵大海 數間之亭 恢恢如高樓巨閣 不知天壤之間 何樂可以易此 至若嶋頂山之明月 鳳凰坮之淸風 朱城嶺之落照 靑石橋之漁火 皆足以供遠眺添幽興 文人詩客 絡繹不絶 田夫樵叟 亦多來遊 主人同樂之 意尤可尙也 七子亦皆守分孝養 能趾闕美 余知斯亭 必傳於久遠 而宋氏之名益盛矣丙寅 三月 日 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原任奎章閣直閣侍講院兼弼善 豊壤後人 趙秉輯 記書

 

 

【번역문】
송호(松湖)는 송씨의 마을이다. 좌우의 산들은 높고 낮아 깊숙해도 궁벽지지 않고 얕아도 드러나지 않는다. 땅은 비옥하고 밭은 기름져 곡식은 자족할 만하니 이른바 산중의 들이 아니겠는가? 두 물줄기는 마을 앞에서 합쳐져 사계절 콸콸거린다. 북쪽에서 뻗어온 줄기가 40여 리에 상당산(上黨山)이 솟아있고, 남쪽에서 뻗어온 줄기가 50여 리에 속리산(俗離山)이 솟아있다. 송호마을 입구에는 바위가 빼어나 바라보는자 아름다움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다. 병인년 송호의 선비인 송재(松齋) 송선생이 그 표덕(表德)으로 정자를 세우니, 곧 이름난 정원의 수석이 비로소 주인을 얻게 되었다. 관란(觀瀾)이라 이름하고 조석으로 정자를 오름에 문득 흔연히 돌아감을 잊곤 했다. 내가 그 사정을 안다고 하여 기문을 짓기를 청하였다. 나와 송재공은 기절과 취미가 서로 비슷하고 거처도 또한 매우 가까워 즐겁고 슬픈 일에 함께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어찌 글을 짓지 않을 수 있으랴? 일찍이 듣건대, 쌍청당(雙淸堂)은 덕을 감추어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는데도 향인들이 그 풍의(風誼)를 높이 여겼고, 삼기공(三杞公)은 인후공검(仁厚恭儉)하여 학행으로 도(道)를 깨쳤다고 한다. 송재공이 이어받아 타락시키지 않고, 때를 따라 회식(晦息)하며 산수를 즐길 뿐 그 외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으니 진실로 어진 후손이라 할 만하다. 주자께서 맹자의 ‘관란지설(觀瀾之說)’을 풀이하여 ‘물결을 보는 것은 곧 도(道)의 근본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재공이 이곳을 취함이 어찌 다만 그러함뿐이겠는가? 대저 이(理)를 잘 말하는 자 먼저기(氣)를 말하고, 체(體)를 잘 말하는 자 먼저 용(用)을 말하니, 진실로 그 끝으로 말미암아 그 근본으로 미루어 나가고 그 흐름으로 인하여 그 근원을 소급한다면, 어떤사물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며 무슨 일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또한 난(瀾)이라는것은 물의 흐름이 급한 곳이니, 세상살이의 위험함이나 인심(人心)의 뒤바뀜이 모두난(瀾)의 부류이다. 잘 보고서 삼가 그곳에 거처하여 탄연(坦然)히 공정(公正)하여
접하는 바가 이와 같이 여유롭다면, 한 줄기 강물일지라도 넓기가 심연(深淵)이나 대해(大海)와 같을 것이요, 몇 칸 정자라도 넓기가 고루(高樓)나 거각(巨閣)과 같을 것이니, 천지 사이에 어떤 즐거움이 이와 바꿀 수 있겠는가? 만약 도정산(嶋頂山)의 명월(明月)과 봉황대(鳳凰臺)의 청풍(淸風)과 주성령(朱城嶺)의 낙조(落照)와 청석교(靑石橋)의 어화(漁火)에 이르러서는 모두 멀리 조망하고 그윽한 흥취를 더하기에 족할 것이다. 문인 시객이 이어져 끊이지 않고 전부(田夫)와 초수(樵叟)가 또한 많이 찾아와 노님에 주인이 같이 즐거워하니 그 뜻이 더욱 가상하다. 일곱 아들이 또한 모두본분을 지키며 효성스러워 그 미덕을 따르니, 이 정자가 반드시 오랫동안 전하고 송씨의 명성이 더욱 번성할 것을 내가 알겠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