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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양산면 누교리 영국사 원각국사비(陽山面 樓橋里 寧國寺 圓覺國師碑) 본문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영국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선사 원각국사 덕소(圓覺國師 德素 : 1107, 예종 2~1174, 명종 4)의 비. 비문의 내용 상 지은이와 쓴 이가 확인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옥천군 편에 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180년(명종 10)에 세웠다. 비신에는 둘레로 당초문을 장식하였는데 아랫부분이 파손되었다.

▨▨▨▨태종(台宗) 추증받은 시호 원각국사(圓覺國師)의 비명(碑銘)【병서(幷序)】
조산대부 동지추밀원사 판사재사 지제고 겸 태▨(朝散大夫 同知樞密院事 判司宰事 知制誥 兼 太▨)
여래께서 말씀하신 3승(乘)·12분교(分敎)·8만법문(法門)은 모두 천축[乾竺]에 갖추어졌으나, 바다 밖의 〈우리〉 나라에는 오히려 불법의 소리[法雷之音]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묘한 말씀[微言]이 미치는 곳에는 멀거나 가까움이 있지 않으니, ▨…▨ 숭상하였다. 그 바람이 변한과 마한의 사이에 크게 떨쳐졌으니, 지혜의 햇살[慧日]이 비추는 바와 가르침의 비[法雨]가 적시는 바가 하나의 구역으로 섞여졌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어려웠던 시기에 〈부처님의〉 남모르는 도움에 자못 힘입어 만세에 ▨…▨ 이루고 ▨…▨ 동쪽으로 퍼졌지만 종파[宗門]는 아직 서지 못하였다. 문왕(文王,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에 이르러서 선왕(宣王, 선종) 재위 3년(1086) 경오에 불법을 구하러 송(宋)에 들어갔다. 전당(錢塘)에 가서 도를 물었으며, 불롱(佛隴)에 올라 바라보고 ▨…▨ 천태(天台)를 의논하는 자들은 대각(大覺, 의천)을 시조로 삼는다. 그러나 사람이 도(道)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므로, 큰 도가 행하여지려면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 무릇 천태(天台)의 보물[秘藏]은 가장 뛰어난 부처의 가르침[法門]이니,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사람이 있어 ▨…▨ 사라지지 않은 다음에야 행복과 이로움을 줄 수 있고 나라[邦國]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각국사가 돌아가신 지 7년이 지난 뒤에 하늘이 국사(國事, 원각국사 덕소)를 세상에 낳아서 장차 바른 법을 지키게 하였다. 어찌 그러함을 알았겠는가? 국사가 ▨…▨ 손을 멈추지 않고[停輟] 부처님의 도(道)를 구하였으니, 하늘이 국사가 바른 법을 지키도록 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여러 경문을 살펴보면 여래께서 집처럼 여기시는 것은 큰 자비의 마음 그것이며, 여래께서 옷처럼 여기시는 것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치욕을 견디는 마음 그것이며, 여래께서 ▨…▨ 게으르지 않은 마음으로 부처의 가르침[佛敎]을 널리 퍼트려 만세에 흘러 통하게 하였다. 마침내 부처의 큰 법륜(法輪)을 능히 굴려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을 바로잡은 자는 오직 우리 국사뿐일 것이다.
국사의 이름은 덕소(德素)이고 자는 혜약(慧約)이며, 어릴 적 이름은 자미(子美)이고 속세에서의 성은 전씨(田氏)였다. 담(潭)▨…▨ 주수(州守)였을 때 정해년(1107) 3월 6일에 어머니 남원군부인 양씨가 꿈을 꾸었는데, 개경[京洛]부터 고을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일산을 펼친 수레[軒盖]가 길을 가득 채웠는데, 국사가 그날 저녁에 태어났다. 부모가 그 귀함을 알고 자미라고 불렀다. ▨…▨ 승려가 말하기를 “국청사(國淸寺)의 정원(淨源, 송대의 이름난 승려)이구나.”라고 하였다. 국사가 기뻐하며[欣然] 더불어 이야기하니 옛날부터 서로 알던 사이 같았다. 마침내 따라가서 대선사(大禪師) 교웅(敎雄)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9세에 승려가 되었다[剃髮]. 웅공(雄公, 교웅)이 항상 말하기를, “우리 종(宗)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사미(沙彌)〈일 것이다〉 ▨…▨.
반드시 국사와 함께 웃고 즐겼다[遊戱]. 하루는 함께 불전(佛殿)을 보고 우연히 대장당(大藏堂)에 들어갔다가 함을 열어 책을 꺼내 국사에게 주었다. 국사가 책을 익혀 능통해지니, 인묘(仁廟, 인종)께서 찬탄하며 말하기를, “이 승려가 앞으로 어느 날엔 가는 반드시 큰 법사(法師)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신년(1128)에 ▨…▨ 선장을 열어 크게 선발하였는데, 선발하기도 전에 자미를 낙점하였다. 다음날에 과연 합격하였으니, 국사는 다만 한 시대의 불종(佛種)만이 아니었으며, 어렸을 때의 명성이 또한 익히 〈장성한 뒤에도〉 세상에 이름났다. 인묘가 왕위에 오른 지[踐祚] 12년의 임자년(1132)에 국청사에 행차하여 ▨…▨사(師).
계해년(1143) 봄에 국사가 문도들을 물리쳐 보내고[謝遣] 두루 산수를 유람하였다. 울주(蔚州) 영취산(靈鷲山)에 이르러 거처하여 머무르니, 저 지혜로운 자들이 돌아오는 장소로 ▨땅에 이보다 더한 곳이 없었으며 사방의 배우려는 자들의 요청은 날이 더할수록 많아졌다. 또한 ▨…▨를 듣고 ▨…▨ 돌아오는 길에 바다를 건너려는데 검은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니, 성난 파도가 산과 같았다. 뱃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국사가 담담하게[恬然] 보문품(普門品)을 외우니, 순식간에 바람과 파도가 스스로 사라져 노를 저어[命棹] 건널 수 있었다. 경오년(1150)에 손수 금으로 경전을 베끼니 ▨…▨.
〈의종이〉 다스린 지 8년인 계유(1153)에 국사를 선사(禪師)로 삼았다. 을해년(1155) 봄에 마납의(磨衲衣)를 하사하였다. 갑신년(1164) 여름에 오래도록 가물자, 의묘(毅廟, 의종)가 태화궁(太和宮)에서 설경회(說經會)를 열고 조서를 내려 국사를 강주로 삼았다. 경문을 강설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세차게 내리니 전야(田野)에 ▨…▨ 어가[駕]를 따랐으니, 왕의 행차[行在]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곧 왕[輦下]이 국사에게 명령하여 한 종파에서 학문이 뛰어나[碩學] 직(職)을 받을 만 한 자를 추천하게 하였으니, 그 천거한 바가 모두 사람들의 바람[公望]에 부합하였다. 어가[駕]가 돌아오다가 평주(平州)에 머무르며 국사를 대선사로 삼았다.
황상(皇上, 명종)이 조정에 임하신 지 2년 신묘(1171)에 ▨…▨ 불법승(佛法僧). 이에 덕이 높은 승려[碩德]를 얻어 스승[師範]으로 삼으려 생각하였다. 그러나 왕의 의중[聖意]도 감히 스스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어, 곧 선(禪)과 교(敎) 양종에서 오래 활동하고 덕이 있는 〈승려들을〉 택하여 각각 그 이름을 봉하여 불상 앞에 두고, 엎드려 기도한 후에 봉한 것 하나를 골랐다. 또한 선대 성인[祖聖]의 진영을 배알하여 ▨…▨ 왕[上, 명종]이 이에 척제(戚弟)인 증세승통(拯世僧統, 충희)과 우복야(右僕射) 박경서(朴景瑞) 등을 보내 명령을 전한 이후로 여러 날 누차 요청하였지만, 국사가 걸맞지 아니하다고 모두 사양하였다. 사신을 보내 3번 요청하니 국사가 왕의 뜻이 정성스럽고 간절함을 알아서 부득이하게 명령을 받아들였다. 갑인년(1194)에 ▨▨▨▨상(上)▨▨ 등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봉숭(封崇)하였다. 11월 갑술에 도(道)와 속(俗)의 여러 신하가 크게 모여 국사를 대접하고 예를 올렸다. 이날 백좌회(百座會)를 열었는데, 행향할 때에 이르러 왕이 국사에게 나아가 공손하게 예를 다한 후 전(殿)에 올랐다. 후에 수창궁(壽昌宮)과 화평전(和平殿)에서 금경회(金經會)를 열었으며, 국사에게 요청하여 ▨▨▨▨▨ 혹은 ▨ 걸어서 임금의 행차를 따르고 있었는데, 〈왕을〉 뵙자 〈왕께서〉 안부를 물으셨으니 그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갑오년(1174) 10월 기축에 ▨ 천수사(天壽寺)에 크게 이끌어 ▨▨. 11월 계사에 가벼운 병이 들었는데 왕이 친히 병석에 임하여 손수 약이 되는 음식을 올렸다. 또한 우복야 박경서에게 명령하여 ▨…▨ 국사가 손을 떨쳐 물리치고는 자리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었다. 왕이 이르기를, “이것이 국사께서 평소에 마음을 잡는 바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날 받들어 모시는 선사 승지(承智)에게 명령하여 의왕사(毉王寺)로 모셔 나가게 하였다. 하루가 지나고 서쪽을 향해 단정하게 앉아 합장하고 입적하였다[化]. 왕이 이를 듣고서 ▨…▨ ▨악산(▨岳山) 서쪽 기슭〈에 무덤을 썼다〉.
국사가 병이 들었을 때 내인(內人) 곽영견(郭永堅)이 꿈에 영▨문(迎▨門), ▨▨하는 소리가 있어 사람에게 묻자 답하기를, “지금이 여래께서 열반하는 때입니다.”라고 하였다. 둘러보니 승도들이 흰 옷을 입고 학 무리처럼 모여들어 둘러싸고 허공에 올랐다가 서쪽 ▨…▨전(電) 다음날 국사께서 과연 입적하였다[不預].
11월 경인에 선사 승지에게 명령하여 해골을 받들어 ▨▨▨ 아래 양산 관내의 지륵산(智勒山) 영국사(寧國寺)에 안장하였다. 을미년(1175) 4월에 태사(大史)를 보내어 ▨▨▨▨▨▨▨▨▨▨▨▨▨▨▨▨▨ 영원사[瑩原]에 있을 때 일찍이 말하기를 “영원사는 선가(禪家)의 오래된 사찰인데 ▨ 일이 어지러우니[紛擾] 부(不)▨▨▨▨▨▨▨륵(勒)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참으로 도를 닦을 곳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요청을 올려서 선사 승지로 하여금 ▨▨▨▨▨▨▨▨▨▨▨▨▨▨▨▨▨▨▨▨▨▨ 병이 없고 옷을 입은 바에 유(有)▨▨▨▨▨▨▨▨▨▨▨▨▨▨▨▨▨▨▨▨ 불전(佛典)을 읽고 나머지 일은 꾀하지 않아서, ▨▨▨▨

(뒷면)
원각국사 비음(碑陰) 문도 직명
선사 승지
삼중대사(三重大師) 재사(再思) 담요(曇曜) 의윤(顗胤) 신▨(神▨) ▨▨
중(重) 문편(文便) 품룡(禀龍) 담기(曇機) 사안(師安) 중익(中益) 도설(道說) 사현(思玄) 도견(道堅) 천관(闡觀) ▨묵(▨默) 심현(心玄) 승편(承便) 계안(繼安) ▨이(▨頤) 처연(處緣) 석예(釋猊)
입선학도(入選學徒) ▨▨ 희문(希文) 효안(効安) 안훈(安訓) 유문(惟文) 남윤(南胤) 동남(动南) 유장(惟章) 영순(領純) 심▨(心▨) ▨주(▨珠) 유안(惟安) 돈수(敦守) 관여(觀餘) 심예(心銳) 인순(仁順) 현중(玄中) 문광(文光) 의인(義仁) ▨▨ 지해(智海) 신연(信淵) 의원(義圓) 혜윤(惠胤) 영연(靈淵) 석난(釋蘭) 회연(懷璉) 득의(得義) 종순(宗順) ▨익(▨翊) 이융(理融) 중안(中安) 계장(戒璋) 정장(定璋) 지오(知奧) 담실(曇實) 영단(令端) 지수(智粹) 충현(冲玄) 계돈(戒敦) 계엄(戒嚴) 계휘(戒暉) 이돈(理敦) 문유(文儒) 수여(須餘) 대현(大賢) 돈준(敦俊) 희관(希觀) 법유(法瑜) 위윤(威胤) 연원(淵遠) 기▨(其▨) 융전(戎全) 광수(光秀) 연보(淵寶) 등 100여 인
개▨사(皆▨師) 의전(義詮) 혜림(惠琳) 관우(觀祐) 존각(存覺) 존정(存正) 규선(珪禪) 법광(法光) 도남(道南) ▨▨ 성대(成大) 원신(元信) 종직(宗直) 신효(神孝) 등 200여 인
불은사(佛恩寺) 중▨▨(重▨▨) ▨청사(▨淸寺) 중대사(重大師) 유정(惟正) 등 300인 천수사▨▨▨▨▨아래 사령(使令) 이상 모두 1,200여 인 (이하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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