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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동 매월당김시습시비(山城洞 梅月堂金時習詩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산성동 매월당김시습시비(山城洞 梅月堂金時習詩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5. 25. 19:23

 

 

 

 

 

 

 

 

 

산성동 상당산성 잔디공원에 자리한 김시습의 시비이다

 

김시습(金時習)에 대하여
1435년(세종 17)∼1493년(성종 24).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1. 가계·성장기
그의 〈상유양양진정서 上柳襄陽陳情書〉를 비롯하여 《매월당집》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李珥)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그리고 《장릉지 莊陵誌》·《해동명신록》·《미수기언(眉叟記言)》 등의 자료에 의하면, 그의 선대는 신라 알지왕의 후예인 원성왕의 아우 주원(周元)의 후손이고,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시대 시중을 지낸 연(淵)·태현(台鉉)이라 한다.
증조부 윤주(允柱)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겸간(謙侃)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일성(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선 선사장씨(仙槎張氏)라 한다.
그런데 위의 내용에서 잘못 전해진 부분이 발견된다. 그것은 김시습의 14대조는 인존(仁存)으로 《매월당집》 세계도(世系圖)에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종래에 그의 원조(遠祖)로 알려진 김연·김태현은 잘못 기록되어 전하여졌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점은 《고려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김시습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는데, 생지지질(生知之質)이 있었다 할 만큼 천품이 영민하였다.
5세에 이미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장래에 자못 크게 쓰겠노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한다.
그뒤 13세까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 성균관대사성 김반(金泮), 별동(別洞)의 윤상(尹祥) 등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한 각종 사서(史書)와 제자서(諸子書)를 배우고 익혔다.
15세에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죽고 아버지는 병이 들어 계모를 맞아들였다. 이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한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 유랑행적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김시습은 이때까지 사부학당(四部學堂)에 입학하지도 않고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는데 본시 벼슬길에 뜻이 없었거나 아니면 문지(門地)로 보아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무인(武人)이었던 까닭에 사회적 진출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송도(松都)를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여, 당시에 지은 글을 모아 24세인 1458년(세조 4)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엮었는데, 그 후지(後識)에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고 적었다.
계속하여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금강산·오대산 및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지은 글을 모아 1460년 《탕유관동록 宕遊關東錄》을 엮었다. 이후는 주로 삼남지방을 유랑하여, 1463년에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녕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내불당에서 교정(校正)일을 맡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을 저주하여 다시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3. 시편창작활동
그러나 그해 다시 효녕대군의 추천으로 원각사(圓覺寺)의 낙성회(落成會)에서 찬시(讚詩)를 바친 점 등으로 미루어 세조 개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노골적인 반감이나 불만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실은 바로 용장사(茸長寺)이며, 그 집의 당호가 ‘매월당’이다.
이곳에서 31세 때부터 37세에 이르는 황금기를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집구시(集句詩)인 〈산거백영 山居百詠〉도 이때(1468)에 지은 작품이다. 그동안 세조예종이 바뀌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481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4. 인생편력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소오산수(嘯傲山水)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버리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죽을 때 화장하지 말 것을 유언하여 절 옆에 시신을 안치해두었는데,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었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부도(浮圖)에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노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 東峯自畵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그밖에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