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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동 임경업장군묘소(楓洞 林慶業將軍墓所) 본문
임경업(林慶業)[1594~1646]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의주부윤으로 적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명나라와 내통하여 청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청에 잡혀 있던 중, 심기원의 모반에 연루되었다 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어 반대파인 김자점에 의해 장살되었다. 충주시 단월동에는 임경업 장군의 사당인 사적 제 189호인 임충민공 충렬사가 있으며, 유물 전시관에서 임경업 장군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어 이와 연계하여 역사적 교훈을 더하게 한다. |
“외교는 비단에 싼 칼”이라는 어느 외교관의 말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거의 모든 인간의 내면과 행동은 그 표리(表裏)가 부동(不同)하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어쩌면 숙명이다. 그 부동함을 최소화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종교나 문명의 목표와 수준일 것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외교는 그런 표리의 불일치가 극도로 만연한 분야였다. 중화질서의 마지막 보루였던 명(明)이 ‘오랑캐’인 청(淸)에 속절없이 멸망하는 상황을 맞으면서 조선을 지탱하던 주요한 질서는 거대한 혼란에 휩싸였다. 그런 혼란은 수많은 모색과 반발과 수정을 거친 뒤에야 ‘소중화(小中華)’라는 개념을 찾아 일단 진정되었다.
‘오랑캐’에게 굴복해 사대할 수밖에 없는 대외적 현실이 자명할수록 ‘복수설치(復讎雪恥)’와 ‘재조보은(再造報恩)’의 이념과 지향은 강화되었다. 조정의 논의와 유자(儒者)들의 글에서 그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투명하게 드러났고, 때로는 그만큼 공허하기도 했다.
임경업(林慶業, 1594∼1646)은 그런 괴리의 시대에 저항하다가 옥사한 비운의 무장이었다. 출전과 망명, 투옥과 비극적인 죽음으로 구성된 그의 삶은 그 뒤 안타까움과 분노의 큰 반향을 일으켰고, 문학 작품으로 재현되어 널리 보급되기도 했다.
순조로운 출세
임경업의 본관은 평택(平澤)으로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이다.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하지 않았다가 그에 와서 비로소 현달했다”는 기록(이재, [밀암집(密菴集)] 권16, <임장군 경업전>)으로 볼 때, 그의 가문은 그리 융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임경업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24세 때인 1618년(광해군 10) 동생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후금이 건국되면서(1616년) 왕조 교체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임경업이 급제한 해에 명을 처음으로 공격했다.
임경업은 함경도에서 군직을 시작했다. 갑산(甲山)에서 2년 동안 근무한 뒤 같은 함경도의 삼수 소농보(小農堡) 권관(權管, 종9품)으로 옮겼다. 거기서 군량과 군기를 잘 구비한 공로로 절충장군(折衝將軍, 무반 정3품 당상관)에 임명되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그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서도 전공을 세워 진무원종(振武原從) 1등공신에 책봉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에 올랐다. 30세의 나이에 이룬 빠르고 순조로운 관운이었다.
이듬해부터는 근무지가 전라도로 바뀌었다. 임경업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겸 우림위장(羽林衛將, 종2품)을 거쳐 방답첨사(防踏僉使, 종3품. 방답은 현재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에 임명되었고, 1년 뒤에는 전라도 낙안(樂安)군수로 부임했다.
이때까지 임경업 개인의 삶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대륙에서 청은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그의 나머지 삶을 지배한 청과의 투쟁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호란과 그 결과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임경업은 33세의 혈기 넘치는 나이였다. 낙안군수였던 그는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참전했지만, 두 달 만에 강화가 성립되는 바람에 다시 내려왔다.
그 뒤 임경업은 평안도에 배속되었다. 청의 주요한 공격로를 막을 수 있는 뛰어난 장수를 배치한 결과였다. 그는 1629년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까지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종4품), 평양 중군(中軍, 종2품), 검산산성(劒山山城, 현재 평안도 선천) 방어사(防禦使, 종2품), 정주(定州)목사, 청북(淸北, 청천강 이북) 방어사, 안변부사, 의주부윤, 의주진 병마첨절제사 등을 겸직하거나 거쳤다. 그가 주둔한 거점은 최북방의 백마산성(白馬山城, 평안북도 의주 소재)이었다.
이때 임경업은 명에까지 이름을 알리는 전공을 세웠다. 1633년 4월 공유덕(孔有德)ㆍ경중명(耿仲明) 등이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내통하려고 하자 명의 장수 주문욱(朱文郁)과 협공해 섬멸한 것이었다. 이 공로로 임경업은 명에서 총병(摠兵)에 임명되었고, 그 뒤 ‘임총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임경업은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경제적ㆍ군사적 상황을 개선시켰다. 조정의 재정 지원을 받아 중국과 무역해 자금을 축적하고 유민(流民)을 모아 둔전(屯田: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을 개설해 상주 인구를 늘렸다.
그러나 조정은 현실보다 명분에 집착했고,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1636년 12월 청군은 재침했고, 보름 여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런 빠른 승전의 요인은 조선이 설치한 주요 방어 거점을 그대로 통과해 수도를 직격(直擊)하는 전략이었다. 당연히 청군은 첫 걸림돌인 임경업의 백마산성을 그대로 지나쳤다. 임경업과 그의 정예병은 조국의 항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강요된 참전
병자호란 이후 청은 대륙 정복을 본격화했다. 청은 조선에 군사와 물자를 요구했고, 조선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장수였던 임경업이 그럴 때마다 파견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임경업은 나라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는 나아갔지만, 다양한 구실로 접전을 회피했고 명에 정보를 제공했다.
청의 첫 목표는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1637년 2월 임경업은 수군장(水軍將)으로 임명되어 출전했지만, 명의 도독 심세괴(沈世魁)에게 미리 정보를 주어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2년 뒤인 1639년 말부터 청은 명의 근거지인 금주위(錦州衛 :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 일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다시 조선에 병력과 군량을 요구했다. 1640년 4월 임경업은 주사상장(舟師上將)에 임명되어 전선(戰船) 120척에 수군 6천여 명과 군량 2만 7천여 석을 싣고 참전했다. 그러나 이때도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 참전 사실을 미리 알렸으며, 힘껏 싸우지 않았다. 청은 심양에 볼모로 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에게 임경업의 행동을 강력히 항의했다. 조정은 임경업의 귀국을 지시했고, 그는 1641년 1월에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청의 압력으로 일단 그의 관직을 삭탈했지만, 곧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로 임명했다. 그러나 참전 중 청에 협력하지 않았고, 승려 독보를 보내 정황을 명에 알린 사실이 발각되었다. 1642년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체포해 청으로 압송했다.
탈출과 망명
그 뒤 세상을 떠나기까지 4년 동안 임경업은 고난에 찬 역정(歷程)을 밟았다. 그는 압송되던 도중 11월 6일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했다. 그는 그전에 심기원(沈器遠)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僧服)ㆍ체도(剃刀)를 얻어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맡겨두었는데, 그것을 이용해 승려로 변장했다. 그는 반년 정도 경기도와 강원도를 돌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1643년 5월 26일 김자점(金自點)의 종이었던 상인 무금(無金, 일명 효원(孝元))의 주선으로 상선을 타고 명으로 망명했다.
그는 그해 가을 중국 제남부(濟南府)의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없이 열악한 교통 수단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청은 임경업의 부인과 형제를 압송했고, 부인 이씨는 심양 감옥에서 자살했다. 임경업은 등주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의 총병인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들어갔다. 명은 그를 평로장군(平虜將軍 : 일설에는 부총병)에 임명했다.
그러나 형세는 이미 기울었다. 1644년 청은 북경을 함락했다. 명은 남경으로 천도했지만 곧 함락되었고, 마등고도 청에 항복하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무장의 결연한 의지는 거대한 현실 앞에서 결국 무너졌다.
압송과 옥사
임경업 장군 묘소. 그는 모진 고문 끝에 53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숙종 23년에 와서야 복관되었고,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묘는 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하였다. 충청북도 충주시 풍동 소재. 충청북도 기념물 제 67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그때 조선에서는 좌의정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났다(1644년). 앞서 말했듯이 심기원은 임경업의 망명을 도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임경업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다. 1645년 1월 임경업은 부하였던 장련포수(長連砲手) 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1646년 6월 서울로 압송되었다.
인조는 그를 친국(親鞠: 임금이 중죄인을 몸소 신문함)했고, 심기원과의 관련을 밝히려고 했다. 임경업은 망명할 때 심기원의 도움을 받은 것은 인정했지만, 역모 가담은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당시 가장 강력한 실력자였던 김자점이 그의 처형을 주장했다. 그는 지난 날 임경업의 상관이자 친밀한 후원자였지만, 앞서 자신의 종 무금이 임경업의 망명을 도운 사실이 드러나면 자신도 역모에 연루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임경업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결국 6월 20일 옥사하고 말았다. 53세의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는 1697년(숙종 23) 12월 복관되고, 충주의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명청 교체의 거대한 국제적 격변 속에서 대명(對明)의리의 이념을 실천하다가 비참하게 옥사한 명장의 생애는 그 뒤 깊은 애도와 공분(公憤)을 불러왔다. 그것은 [임경업전]이라는 소설로 재구성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송시열(宋時烈)ㆍ이재(李縡) 같은 조선 후기의 주요한 유학자들도 전기를 지어 그를 기렸다(<임장군 경업전>. 각각 [송자대전] 제213권, [밀암집] 제16권).
<참고문헌>
이복규, [임경업전 연구], 집문당, 1993; 이성무, <임경업-병자호란, 치욕과 맞서다>, [명장열전], 청아출판사, 2011; 장덕순, <임경업>, [한국의 인간상] 2, 신구문화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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