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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53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한벌리 입구에 세워져 있는 남창원 기념비의 모습이다.소화 19년 4월(1944년)에 건립된 일제시대때 구장을 지냈던 남창원의 기념비이다.비의 건립시기는 소화라는 글을 없애 놓았다 비석의 형태나 동네주민들에 의하면 일제시대때의 비석이 맞다. 비의 전면에 구장남창원기념비(區長南昌源紀念碑)라고 음각되여 있으며 좌우로 그간의 행적이 음각되여 있다. 한벌리 주민의 성씨는 주로 박씨, 이씨, 남씨의 세 성씨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 남창원의 행적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십유성상 장어백가 능소능대 시동일가 성적양노 재삼수상 의재차학 영세칭송(十有星霜 長於百家 能小能大 視同一家 成籍良奴 再三受賞 義哉此學 永世稱頌)이라고 표기되어있다.
한벌리는 마을이 큰 벌판이므로 한벌이라 하였다. 본래 음성군 동도면(東道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한상리(閑上里)와 한하리(閑下里)를 병합하여 한벌리가 되었다. 1956년 7월 8일 음성면이 음성읍으로 승격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 있는 일제강점기 박갑동의 치적을 기리는 비. 박갑동 시혜비는 일제강점기인 소화15년 (1940년)에 세워진 비(碑)로서, 박갑동은 농민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빌려주고 소작료를 적게 받거나 면제해 주는 등의 자선 사업을 한 인물이다. 비석 앞면에는 ‘유학박갑동시혜비(幼學朴甲東施惠碑)’라고 쓰여 있으며, “우리에게 토지를 베풀어 자애스런 말로 농사짓게 하였고, 수입을 면제하였으니 자선으로 생업을 삼았다네(我播土地 愛言小作 免除收入 慈善爲業)”라고 쓴 ..
음성향교앞에 자리하고 있는 송덕비입니다. 음성시내 이곳저곳에 있던 비석을 한군데로 모아놓은것입니다. 음성을 스쳐간 관찰사와 현감등의 비석과 함께 일제강점기와 현재의 인물등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회촌(回村)이라 불리우는 도람말 가기전에 도로가에 자리하고 있는 광주인 반혁동의 기념비입니다. 회촌이라는 지명에서도 보듯이 보천 서쪽 개미산 마을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 백마령고개 가기 전 마을입니다. 마을에 들어오려면 길이 "꾸불꾸불"하여 돌아돌아 온다고 도람말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마을 앞으로는 청주에서 충주로의 옛도로가 지나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구장반혁동기념비(區長潘爀東紀念碑)라고 적혀있으며 보천3구주민일동이름으로 신사(辛巳)년에 건립하였습니다.구장 반혁동 기념비의 건립시기는 신사년으로 1941년 일제강점기 시대입니다.
지금은 폐교된 대장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후미리 석불입니다. 후미리사지에 있던 석불로 반출되어 지금은 대장초등학교 교정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부부분이 망실되었습니다. 향토전시관이나 아니면 원래의 고향인 후미리사지로 이건되어야 할거 같습니다. 마을 주민(노명식, 67세)의 전언에 의하면 석불은 과수원(후미리 1614-10번지) 한가운데 서 있었으며, 발부분은 묻혀 있었고, 지상에노출된 전체 높이는 1.5m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불상이 큰 돌에 붙어있었다고 표현된 것으로 보아 바위에 양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불은 1970년대 후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을 무렵 새마을 지도자들이 천렵을 왔다가 경운기에 싣고 갔다고 하며 주민들이 찾으려했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사지에서 발췌]
미타사 오르는길 우측으로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숙종시절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과 엄찬의 공적비입니다.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지명 또한 비선거리라는 명칭이 생겼습니다. 소이면 비산리 비석거리에 있는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과 엄찬의 선정비입니다. 두 비석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비석의 크기나 모양등으로 보아 한사람의 솜씨인 듯 합니다. 이국헌이 충주목사로 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후임으로 충주 목사로 온 사람이 엄찬입니다. 엄찬은 1693년(숙종 19) 충주목사겸충주진관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전임 충주목사 이국헌(李國憲)이 갑자기 죽음을 당하자,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의심스러운 여섯 사람을 가두었다. 그런데 이국헌의 후임으로 온 충주목사 엄찬까지도 꾸짖고 욕보이자, 엄찬이 이국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