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효자각
- 사인암
- 상당산성
- 외사리 당간지주
- 보성오씨
- 청주박물관
- 곡산연씨
- 국립청주박물관
- 법주사
- 화양구곡
- 공주박물관
- 선돌
- 경주김씨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충북의 문화재
- 공산성 선정비
- 각연사
- 효자문
- 문의문화재단지
- 청풍문화재단지
- 청풍문화재단지 비석
- 충주박물관
- 밀양박씨
- 문경새재
- 부도
- 단지주혈
- 화양동 암각자
- 현충시설
- 부여박물관
- 사과과수원
- Today
- Total
목록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53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옹몽진(邕夢辰)[1518~1584]의 본관인 순창 옹씨는 고려 시대에 병부 상서를 지낸 옹희태(邕羲泰)를 비조로 하며, 원래 고려 시대에 거족이었다 한다. 고려가 망하면서 초산(楚山)[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옥천(玉川)[지금의 순창]의 향리로 강속되었다. 옹몽진이 음성 현감을 역임하고 충청도사, 병조 좌랑을 거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이르러 집안을 다시 세우면서 순창 옹씨의 시조가 되었고 한다. 그러나 옹몽진의 증조할아버지인 옹은(邕誾)을 시조로 보기도 한다.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응룡(應龍)·응기(應祈). 증조할아버지는 옹은(邕誾), 아버지는 순창군의 호장인 옹태운(邕太雲)이다. 옹몽진은 1518년(중종 13년) 10월 순창군의 오산 아래[지금의 순창..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주목사 이국헌의 선정비입니다.이국헌(李國憲)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문숙(文叔)이다. 부친은 이여연(李汝淵)이다. 1660년(현종 1) 증광시(增廣試)에 생원 3등 45위로 입격하였다. 1676년(숙종 2) 호조정랑(戶曹正郞), 문의현령(文義縣令), 부사과(副司果), 이듬해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역임했다. 1683년(숙종 9) 부사직(副司直), 1684년 밀양부사(密陽府使), 상의첨정(尙衣僉正), 무주부사(茂朱府使), 1685년 남양부사(南陽府使), 1687년 훈련주부(訓鍊主簿), 1689년(숙종 15) 충주목사(忠州牧使)에 부임하였다. 선정비는 1691년(숙종 17)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묘갈형 비신으로 위가 ..
향교 앞의 불망비에는 ‘도순찰사민공치상영세불망비(都巡察使閔公致庠永世不忘碑)’라 쓰여 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공충감사를 연임했던 1870년이다. 민치상(1825-1888)은 조선후기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양(景養), 사호(賜號)는 하당(荷堂).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5대손이며, 민용현(閔龍顯)의 아들이다. 1845년(헌종 11) 전강(殿講)에서 수석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849년 홍문관수찬에 임용되었다. 1850년 8월 진하사은 겸 세폐사(進賀謝恩兼歲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56년(철종 7) 홍문관부응교·예방승지, 1859년 성균관대사성, 이듬해 홍문관제학을 역임, 이어 도승지..
충청도관찰사는 충청도를 다스리는 입법·사법·행정의 수장으로, 주로 충주목에 거주하며 백성을 다스렸다.충청도 전역을 다스리다 보니 충청도에 속하는 곳에는 그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곳곳에 선정비나 영세 불망비등을 세웠다.심의신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파주 광탄면 방축리에 묘가 있다.자는 舜欽, 본관은 靑松, 상주목사를 지낸 能述의 아들이다. 생부는 판돈녕부사를 지낸 能岳이다. 1810년(순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829년에 처음으로 주부에 등용되었다. 그해 춘당대전시에 장원급제하여 특별히 발탁되어 통정대부에 승진된 후 중궁전승사관에 임용되고 1836년(헌종 2)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1838년에는 병조참판을 거쳐 그 해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1841년에는 이조참판에 임용되었다.1843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조선 후기 관찰사 김응근(金應根)[1793~1863]의 선정비입니다.김응근은 조선시대 철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계경(溪卿), 호(號)는 의석(宜石)이다. 참판(參判) 김명순(金明淳)의 아들이며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의 동생,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의 형이다. 1816년(순조 16)에 사마시 생원 3등 6위에 급제하여 1822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고, 이후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857년(철종 8)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860년 공조판서,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개인적인 능력보다는 안동김씨의 세도에 힘입어 판서직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글씨를 잘 써서 평양의 의열사비(義烈祠碑)를 썼다.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할 때에..
오래전에 들렸던 음성향교를 다시 한번 더 들려 공적비를 살펴보는데 이해용의 기념비가 보이질 않는다. 아픔도 역사라고 친일파의 비석이라고 없앤것은 아니길 바랄뿐이다. 없애는 것이 아니고 따로 안내판을 설치하여 학습의 장으로 삼았으면 더 좋치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이다. 이해용의 비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해용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해용 공적비중 일부는 훼손돼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비 좌측 하단에 ‘己巳六月’(기사(년)육월)란 글자가 육안으로 확인된다. 즉 기사년(1929년) 6월에 비를 건립한 것을 알수 있다. 또 친일파 이해용(李海用의) 한자이름과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 동일하다. 청주백제유물전시관 강민식 박사는 “음성향교 앞에 설치된 이해용 기념비는 일제 때 세워진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