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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 박동명장군의 의마총비입니다. 매은당의마지총비(梅隱堂義馬之塚碑)라고 적혀있으며 의마총에 대한 이야기가 각자되어 있습니다.
옥산면 상동림에 있는 밀양박씨가문에서 세운 선조들의 신도비와 상석을 건립한것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적석비문입니다.
병절교위(秉節校尉 )는 교위계(校尉階)의 하한(下限)이 된다. 이러한 종6품관에게는 1438년(세종 20)에 정비된 녹과(祿科)에 의거하여 실직(實職)에 따라 일년에 네 차례에 걸쳐 모두 중미(中米 : 중질의 쌀) 5석, 조미(糙米: 매갈로 만든 쌀) 17석, 전미(田米 : 좁쌀) 2석, 황두(黃豆 : 콩의 하나) 8석, 소맥(小麥 : 참밀) 4석, 주(紬) 1필, 정포(正布) 9필, 저화 4장을 지급하였다. 또한, 종6품관에게는 조선 초기에 과전 30결을 지급하였으나 1466년(세조 12) 하였다. 그러나 직전법도 1556년(명종 11)에 완전히 폐지되고, 조선 후기 『속대전』에서는 매달 미 1석 1두, 황두 10두를 지급하도록 규정되었다. 남이면 상발리에 위치한 병절교위충좌위부사과(秉節校尉忠佐衛副司果..
옥산면 금계리 마을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청주인 곽상영의 송덕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청주곽공상영송덕비(淸州郭公常榮頌德碑)라고 적혀 있으며 뒤에는 곽상영의 송덕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비석에 곽상영의 송덕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청주인 곽상영은 빈농의 가장으로 한 가족에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주경야독 끝에 교원검정고시에 합격하여 합격이후 교사 교감 16년 교장 30년 도합 46년간을 초등교육에 봉직하면서 교육자로서의 초심을 지키며 사랑과 정성으로 후세를 육성하는데 앞장섰다. 그 공로로 여러차례 교육공로상및 국민훈장을 수상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공양을 위해 고향의 금계교로 자원근무 하기를 수차례 하였으며 외지부임 중에는 밤마다 고향의 부모를 향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배를 올리고 부친이 노..
옥산면 동림리(東林里)에 조천상(曺天祥)의 효자문이 있다. 천상은 조선 중기 때의 인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극진하였다. 어느 날 마을에 도적이 침입했다. 아버지가 도적의 칼에 해를 당하게 되자 몸으로 막으며,“아버지 대신 저를 죽여달라”고 애원했다. 도적은 잔인하게도 어린 천상의 두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천상은 그 후에도 부모를 극진히 섬겼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었다. 이번에는 손가락 하나를 잘라(단지주혈) 어머니의 입에 넣었다. 어머니는 피를 마시더니 얼마 후 소생하였다. 아버지가 울면서,“저번에는 애비를 위하여 도적에게 두 손가락이 잘리더니 이번에는 어미 때문에 또손가락이 끊어졌구나. 부모로 하여 너는 몸둥이만 남는구나!”하며 애통해 했다. 천상은 부모의 상에 반드시 예제(禮制)를 따..
옥산면 환희리에 있는 백록서원입니다. 백록서원이라는 비석을 보며 마을안으로 들어서면 마을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710년(숙종 36)에 권상(權常, 1508~1589)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안동권씨의 서원이다. 1760년(영조 36)에 충청북도 청주시 월오동(月午洞)에 있는 봉계서원(鳳溪書院)으로 합사하였으나 1871년(고종8) 봉계서원이 철폐되자 1929년에 안동권씨 문중에서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남강사(南岡祠)’라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29년에 중건하고 1966년에 보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양회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경효사(景孝祠)’라는 현판을 걸었다. 마당 앞으로 솟을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