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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흥덕구(興德區) (15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날씨가 참 좋다.오랫만에 다시 국사리에 있는 강감찬장군의 묘소를 찾았다.국사리도 동네에 많은 변화가 있다.새로 신축된 건물들도 많고 주위환경이 많이 변하였다.동네어귀에 차를 세우고 시멘트길을 따라 충현사를 들렸다. 홍살문이 보이며 주위로는 늦가을의 정취가 참 좋다. 충현사는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위치한 고려시대 강감찬장군을 모신사당이다.강감찬장군의 묘의 진위여부가 불투명한 관계로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다.주차시설도 많이 미비하다.강감찬장군의 알려진 이름과는 달리 묘가 참 초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충현사는 강감찬 장군의 묘소를 찾아 헤매던 후손들이 지난 1963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 국사봉 뒤쪽 기슭에서 묘지석을 발견해 이듬해인 1964년 12월 그 위치에 묘소를 새로 만들고 묘역을 정비한 뒤 지난..
국사리에는 예전부터 유명한 장군의 묘가 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금주(衿州) 강씨 후손들은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하고 강감찬 묘로 삼았습니다. 묘지석이라 함은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묘소의 소재를 기록하여 무덤에 묻어 두는 돌을 말합니다.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의묘(玉山面 國仕里 姜邯瓚將軍의墓) (tistory.com)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의묘(玉山面 國仕里 姜邯瓚將軍의墓) 충현사옆에 위치한 강감찬장군의 묘와 묘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석조물이다 강감찬(姜邯贊, 948년~1031년) 귀주대첩의 승리를 이끈 고려 시대의 명장이며, 문신이다.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 king6113.tistory...
이 열녀각은 조선 숙종 2년(1676)에 경주인(慶州人) 이선소(李鮮昭, 1596~ ? )의 처 강화최씨(江華崔氏)의 정렬을 기리어 나라에서 세운 정려이다. 본래는 학천리 양지마을에 있었으나 1920년에 충북선 철로공사로 음지마을의 현위치로 이전하엿다. 지금의 열녀각은 숙종 7년(1681)에 개건하고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정문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1921년에 이필영(李苾榮)이 짓고 이재각(李在珏)이 쓴 "이건기(移建記)" 목판이 걸려 있다. 열녀각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에 있다. 2015년 4월 17일 청주시의 향토유적 제91호로 지정되었다. 열녀가선대부이선소지처정부인강화최씨지려(烈女嘉善大夫李鮮昭之妻貞夫人江華崔氏之閭)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먼젓번에 다녀올때보다 지붕이나 단청등이 모두 ..
기독교전래기념비는 1985년 한국교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충북지역의 교회들이 힘을 모아 충북의 기독교 진원지인 이 곳 신대리에 세운 비석입니다.신대교회가 새로 건축되며 교회옆으로 이건하였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기독교전래기념비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그간의 충북의 기독교전래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신대리에 있는 신대교회 구건물입니다.1977년도에 지여진 건물입니다.건물입구에는 이춘성전도부인과 오을석장로의 추념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신대교회는 충북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하는 교두보 역할을 한곳입니다. 구 건물을 이용하여 기독교역사박물관등을 조성하여 충북의 기독교전파와 함께 역사를 공부하는 곳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혼자만의 바램입니다.
옥산면 몽단이고개에 있는 의마총입니다.비석에는 매은당의마지총비(梅隱堂義馬之塚碑)라고 적혀있으며 한쪽에는 몽단이재와 의마총에 유래를 설명한 유래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매은당 박동명 장군은 선조 8년(1575)에 청주시 비하동 '주봉마을'에서 출생, 선조 32년(1599)에 무과에 급제하여 태안군수, 제주목사를 봉직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62세의 몸으로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올라갔다.왕을 안전하게 피신시킨 뒤 적과 맞서 싸우다 안타깝게도 적의 화살에 맞아 순국하였다. 부하들은 장군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고, 다만 애마가 물어뜯은 박 장군의 저고리만을 발견하게 된다.박동명의 휘하장수 김득성은 저고리를 말 안장에 올려놓고 도술로 화살을 허공에 저어 박 장군의 혼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