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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흥덕구(興德區) (15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저산마을 입구에 있는 원추형의 돌탑이다. 마을에 있는 학천과 더불어 정월14일에 제를 지낸다.저산리도 지금은 많이 변하였다. 산을 깍아 전원주택 단지를 조성하였으며 평화로왔던 농촌의 풍경은 사라지고 점차 도시화되어 가는 느낌이다. 저산리는 본래 청주군 서강내 이상면의 지역으로 은적산에서 저산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돼지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모양과 같다하여 저산, 또는 계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백천리, 상저산리, 하저산리와 남차이면의 삼치리 일부를 병합하여 저산리라해서 강내면에 편입하였다. 1982년에 역골, 안말, 윗말을 1구로 하고 큰말, 백천동, 성재를 2구로 분리하였다. 慶州李氏 中始祖 松窩公의 三世 建이 남이면 팔봉리에 永眼한 이래 八世孫 昌鶴公(29세)이 저산리에 정착하여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관련항목 보기에 있는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위패 모신 사당. 충렬공(忠烈公)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부사로서 동래성을 사수하다 순절하였다. 동래에 있던 묘소를 이장한 후 1610년(광해군 2)에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이 사당을 건립하였다. 흥덕구 수의동 강촌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이 비좁아 약 50년 전에 후손들이 원래의 위치에서 약 50m 위쪽으로 이전하여 증축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80년대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된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으로 된 마루방에 3개의 분합문을 달았으며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했다. 가구형식은 1고주 5량가이며 모..
지금의 건물은 1980년대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된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으로 된 마루방에 3개의 분합문을 달았으며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했다. 가구형식은 1고주 5량가이며 모로단청을 하였다.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웠고, 사당 앞에는 솟을삼문을 설치하였는데 “忠烈廟(충렬묘)”라고 새긴 현판을 달았다. [현황] 충청북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2004년 청주시에서 새로 천곡기념관과 사당을 신축하여 위패를 모시게 되자, 후손들이 송상현 부인의 혼백을 모시는 사당으로 삼아서 제향하고 있다. 주변이 공원화되어 있고, 문화유산 해설사도 상주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정려문. 여산송씨(礪山宋氏) 송현기(宋鉉器)의 부인인 밀양박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55년에 세운 정려문이다. 흥덕구 강서사거리에서 청주가로수길을 따라 경부고속도로 청주 IC 방향으로 약 3.3㎞ 가량 가면 오른쪽에 수의동 강촌마을이 있는데, 이 정려문은 마을 입구 공터의 왼쪽에 있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지붕 옆면에 풍판을 달았다. 얕은 자연석 기단 위에 높이 약 1m 가량의 팔각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두공은 이익공 형식이며, 첨차 위의 전면에는 용머리 조각을, 후면에는 봉황의 머리를 조각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하였다. 건물 안에는 편액과, 중수기가 나란히 걸려있다.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는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 한금섬(韓金蟾), 이소사(李召史)의 정려문.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그의 두 소실이었던 한금섬과 이소사의 정절을 함께 기려 세운 정려문이다. 본래는 1595년(선조 28) 송상현만 정려되었으나, 1704년(숙종 30)에 두 소실이 정려됨에 따라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54년에 중수한 것이다. 한금섬은 본래 함흥(咸興)의 기생으로 송상현의 첩이었다. 13세에 송상현을 따라 동래(東萊)로 갔다가 임진왜란으로 동래성이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할 때 곁에서 시중을 들다가 적에게 잡혀 3일간 항거한 끝에 순절했다. 이소사는 이양녀(李良女)라고도 하는데, 송상현의 소실로 임진왜란 때 동래..
수의동 강상촌에 있는 송상현의 신도비입니다.신도비옆에는 신도비를 세우게 된 취지문이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충렬문의 오른쪽에 1983년 3월에 세운 송상현신도비의 번역비가 있다. 번역비는 화강석으로 된 거북대좌 위에 높이 235㎝, 폭 75㎝, 두께 42㎝의 오석 비신을 세웠으며, 그 위에 앞뒤로 각각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함께 물고 있는 모습의 이수를 얹었다. 원래의 신도비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점차 아는 이가 적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13대손 송칠용(宋七鏞), 송원용(宋源鏞), 송신용(宋信鏞)과 14대손 송해운(宋海雲), 송해현(宋海玹) 등이 상의하여 단국대학교 박천규(朴天圭) 교수에게 부탁해서 국한문으로 번역하고, 14대손 송해석(宋海碩)의 글씨로 번역비를 세운 것이다. 신도비가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