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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의문화재단지 공적비군에 있는 문의 현령을 지낸 이위재의 청덕휼민영사비입니다.비석의 전면에는 현령이후위재청덕휼민영사비(縣令李侯渭在淸德恤民永思碑)라고 각자 되어 있으며 비석의 건립시기는 무인년(戊寅年.1878년) 유월 입니다. 승정원일기 2811책 (탈초본 131책) 고종 12년 3월 2일 기해 28/33 기사 1875년 光緖(淸/德宗) 1년 ○ 有政。 吏批, 判書金在顯·參判尹滋承進, 參議未差, 承旨缺, 以閔奎鎬爲內閣提學, 閔泳商爲承旨, 朴齊寅爲右參贊, 金在鶴爲敦寧都正, 金翊鎭爲捲草官, 許傳爲藝文提學, 徐相德爲敦寧參奉, 李復永爲注書, 鄭晉默爲高陽郡守, 趙冕夏爲淸道郡守。 開城分敎官單崔柱錫, 前持平李敏銖, 年七十一, 副司果朴載瑋·前別提全宜鍾, 已上, 年七十已上今加通政, 加一資事承傳, 高嶺僉使閔義鎬·礪山府使權寅..
조선조시대 문의현감을 지낸 정겸환의 영세불망비입니다. 정겸환은 연일인으로서 영의정을 지낸 정호의 증손이며 돈령부도정 을 지냈고 아버지는 연풍현감을 지낸 정희하이다. 현령정후겸환영세불망비(縣令鄭侯謙煥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있다. 정희하의 선정비는 살미면 수회리에 있고 정호의 무덤은 괴산 석정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군수서후병익청간선정비(郡守徐侯丙益淸簡善政碑)라고 적혀있다.비석의 건립시기는 갑진(甲辰)년(1904년)이다. 1900년대 문의군수를 지낸 서병익의 치적을 기린 청간선정비입니다. 군수서병익의 선정비는 현도면 죽전리에도 1기 자리하고 있습니다.
통정대부김공교희시혜불망비(通政大夫金公敎羲施惠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으며 기묘(己卯)년(서기 1939년) 3월입니다. 김교희는 일제강점기 시절 두모리 출신의 지주로서 당시 소작인들에게 도세를 감면해 주는 등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또한 마을발전을 위해 열심을 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소작인들이 모여 시헤불망비를 세웠다.
문의면 두모리에 있는 경주인 김교의의 시헤불망비 입니다. 지금의 자리가 원래의 자리는 아니며 도로가 나면서 이곳저곳에 있던 문의현령등의 선정비와 하께 지금의 자리를 잡은 듯 하다. 비석의 전면에는 통정대부김공교희시혜불망비(通政大夫金公敎羲施惠不忘碑)라고 음기되여 있다. 김교희는 두모리일대의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들에게는 적은 소작료를 받음으로서 소작농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그러한 김교의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시혜비석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왜 보지 못했을까?몇 번이고 다닌 길이지만 이상스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길가에 자리잡고 있는 비석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뭔가 딴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인데......문의현령과 군수를 지낸 영세불망비 4기와 경주김씨 문중에 시헤비가 1기 자리하고 있다.서로가 다른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한 곳으로 모아 놓은것 같다. 이위재(李渭在)는 승정원 일기를 살펴보면 1866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시작으로 남평현감(南平縣監)등을 역임하고 고종12년(1875년)문의현령으로 제수된다.문의현령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875~1877년까지 문의현령을 지내게 된다. 아마 선정비는 1877년 이후 세워진 것이 아닐까 한다. 有政。 吏批, 判書金在顯·參判尹滋承進, 參議未差, 承旨缺, 以閔奎鎬爲內閣提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