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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용방리 (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송우암 유허비 옆에 있다 우암 송시열의 외할아버지이다 우암 송시열은 1607년 음력 11월 12일 조선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에서 사옹원 주부를 지낸 은진 송씨 송갑조와 곽자방의 딸 선산곽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동대도호부사 송여해(宋汝諧)의 후손으로 증조부 송구수(宋龜壽)는 영경전참봉(永慶殿參奉)·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을 역임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이름이 높았다. 그의 가계는 대대로 서인이었으나, 그의 5대 방조 송세충(宋世忠)의 손자 송응개(宋應漑), 송응형(宋應泂)은 동인이 되었다. 같은 충청남도 출신으로 함께 김장생과 김집의 제자가 된 송준길 역시 그의 먼 친척으로 13촌이 된다. 곽자방의 다른 딸이자 그의 이모는 한산이씨 이덕렴과 결혼하였다. 또한 송시열의 조부와 송준길의 조부는 이윤..
송시열 유허비는 단칸 팔작 기와집의 비각안에 세워져 있으며 비좌는 합쳐 3m의 높고 큰 비로서 그 형태는 장방형의 비신(碑身)에 지붕모양의 비갓을 씌웠는데 앞면에는 해서(楷書)로 "우암 송선생 유허"(尤菴 宋先生 遺墟)라 썼고 뒷면에는 "숭정후 삼술 이월일"(崇楨後 三戌 二月日)이라고 만 적혀 있다. 송시열 (1607∼1689)선생의 본관(本貫)은 은진(恩津)이며 자(字)는 영보(英甫)이고 호(號)는 우암(尤菴)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으로 1607년 선조(宣祖) 40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九龍村) 그의 외가 곽씨 문중에서 출생한 조선중기의 대유학자이다. 충북 기념물 제 45호로 지정 관리되고있다. 우암 유허비 옆에는 우암의 외할아버지인 곽자방의 충신정려문이 같이 하고있다. 용방리는 옥천군 이내면(利..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 마을 금강가 산기슭에 위치한 용문영당은 최초에는 구룡촌의 곽, 홍, 송씨가 창건한 용문서당인데 이곳에서 출생한 우암 송시열선생이 소년시절 학문을 닦은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그 후 1650년 송우암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옥천에 내려와 용문서당을 다시 세우고 경현당이라 이름짓고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송우암 선생이 돌아가신 후 1697년 숙종 23년에 우암 선생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고 용문영당이라 하였는데 1871년 고종 8년에 훼철되었다가 그 후 다시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게 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여섯칸, 측면 두칸반, 맞배집으로 방이 한칸이고 나머지는 대청으로 되어 있다. 현재도 영당안에는 우암선생의 영정이 보존되어 오고 있는데, 상반신만을 그린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