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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우암 송시열 (1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효절의(忠孝節義)는 우암송시열의 학맥 인물들이 '한국 최고의 구곡(九曲) 화양구곡' 암벽에 새겨놓았다. 충(忠)은 국가와 사회의 공존공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효경'에 "효(孝)는 자신을 잘 수양하고 인륜적 도리를 실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리고 부모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절개는 군신 친구 남녀 부부간 등 인간관계 때 지켜야하는 정렬(貞烈)과 절제이다. 맹자는 "의리는 사람이 가야할 바른 길이다"라고 했으며 '호연지기'는 의(義)가 모여 생긴다고 했습니다. 화양구곡의 제4곡인 금사담 주위에 있는 암벽에 새겨진 각자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글씨를 알수 있습니다. 금사담과 함께 첨성대 그리고 파천가에는 많은 암각자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 등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이 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화양서원의 자리에 놓여 있다.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 22년(1696)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창건되던 해에 현판을 하사받아 숙종 42년(1716)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그릇된 세금징수로 심한 민폐를 끼쳐 철종 9년(1858)에 폐쇄되고, 논란 속에 고종 7년(1870) 건물이 헐리었다.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뒤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숙종 42년(171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윤봉구가 지었다.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
조선 중기의 학자로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에서 태 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 庵이다. 고조는 송세량宋世良, 증조는 송구수宋龜壽, 조부는 송응기宋應期이다. 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 인 선산곽씨이다. 모두 5남 2녀를 두었는데, 송시열은 3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한산이씨로 이덕사李德泗의 딸이다 아버지 송갑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에서 강원도로 피난하였다가 회덕 종가를 들러 1594년(선조 27) 선산곽씨와 혼인한 후 처가인 구룡촌에 머물렀다. 옥천에서 회덕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 소제蘇堤 등으로 이거하던 26세까지 살았으며, 이후 주로 회덕에서 거주하였다. 이미 8세부터 회덕의 송이창(宋爾昌, 1561~1627) 집을 오가..
생각의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다. 설마 길가에 저리 있을줄이야 시원한 계곡사이로 멋진 물소리 들으며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사담동천은 찻소리 씽씽거리는 길가 한쪽 끝. 바위에 악착동자같이 매달려 있었다. 2019.07.07 청천면 사담리 사담동천.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 167호 속리산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법주사(法住寺) 근처의 수정교(水晶橋) 앞에 있는 비로서 비각 안에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이다. 1666년(현종 7)에 송시열(宋時烈)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