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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음성향교 (1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조동환의 비석입니다.조동환의 자는 문옥(文玉), 호는 정암(靜岩)이며,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음성읍 평곡리에서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趙大妃)와 혈연 관계가 있어, 1905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에 기용되었고 삭녕세무서장으로 근무하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조동환은 1905년 7월 度支部 稅務主事에 임명되었다.1908년 10월 朔寧稅務署長으로 영전되었다.1911년 6월 부터 8년 4개월간, 1922년 4월 부터 5개월간, 1923년 10월 부터 9년 5개월간 만 18년 남짓 陰城面長으로 재직하였다.1924년, 1927년 및 1930년에는 선거에 의해 忠淸北道評議員으로 선출되었다.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
옹몽진(邕夢辰)[1518~1584]의 본관인 순창 옹씨는 고려 시대에 병부 상서를 지낸 옹희태(邕羲泰)를 비조로 하며, 원래 고려 시대에 거족이었다 한다. 고려가 망하면서 초산(楚山)[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옥천(玉川)[지금의 순창]의 향리로 강속되었다. 옹몽진이 음성 현감을 역임하고 충청도사, 병조 좌랑을 거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이르러 집안을 다시 세우면서 순창 옹씨의 시조가 되었고 한다. 그러나 옹몽진의 증조할아버지인 옹은(邕誾)을 시조로 보기도 한다.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응룡(應龍)·응기(應祈). 증조할아버지는 옹은(邕誾), 아버지는 순창군의 호장인 옹태운(邕太雲)이다. 옹몽진은 1518년(중종 13년) 10월 순창군의 오산 아래[지금의 순창..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조선 후기 관찰사 김응근(金應根)[1793~1863]의 선정비. [개설] 김응근은 조선시대 철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계경(溪卿), 호(號)는 의석(宜石)이다. 참판(參判) 김명순(金明淳)의 아들이며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의 동생,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의 형이다. 1816년(순조 16)에 사마시 생원 3등 6위에 급제하여 1822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고, 이후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857년(철종 8)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860년 공조판서,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개인적인 능력보다는 안동김씨의 세도에 힘입어 판서직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글씨를 잘 써서 평양의 의열사비(義烈祠碑)를 썼다. 충청도관찰사..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변중기의 기념비. 변중기 기념비는 1930년대 읍내리 1구장을 역임한 변중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이다. 변중기는 읍내리 1구장 역임 이외의 행적은 미상이다. 비는 1936년에 세워졌다. 비신(碑身)의 총 높이는 119㎝이며, ..
[청안동헌앞에 심의신 불망비] [청천리 마을초입에 있는 심의신공적비]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관찰사 심의신을 기리는 비. 관찰사는 충청도를 다스리는 입법·사법·행정의 수장으로, 충주목에 거주하며 백성을 다스렸다. 음성은 충주목 관할하의 현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