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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향교 공적비군(陰城鄕校 功績碑群)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음성향교 공적비군(陰城鄕校 功績碑群)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11. 11. 18:44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조선 후기 관찰사 김응근(金應根)[1793~1863]의 선정비.

[개설]

김응근은 조선시대 철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계경(溪卿), 호(號)는 의석(宜石)이다. 참판(參判) 김명순(金明淳)의 아들이며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의 동생,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의 형이다. 1816년(순조 16)에 사마시 생원 3등 6위에 급제하여 1822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고, 이후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857년(철종 8)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860년 공조판서,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개인적인 능력보다는
안동김씨의 세도에 힘입어 판서직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글씨를 잘 써서 평양의 의열사비(義烈祠碑)를 썼다.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할 때에 『공산지(公山誌)』를 편찬한 바 있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형태]

묘갈형 비신으로 위가 둥글게 처리되었다. 비 전체의 높이는 100㎝이다.

[금석문]

앞면 중앙에 ‘관찰사김공응근청덕인정비(觀察使金公應根淸德仁政碑)’라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관찰사 심의신을 기리는 비.

[개설]

관찰사는 충청도를 다스리는 입법·사법·행정의 수장으로, 충주목에 거주하며 백성을 다스렸다. 음성은 충주목 관할하의 현이기에 관찰사가 가끔 들르던 길목으로, 음성의 백성에게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 수령을 기념하기 위해 송덕비나 불망비를 세우곤 하였다.

[위치]

심의신 영세불망비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 충주 쪽으로 가는 옛 국도 변에 위치한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들과 함께 서 있다.

[형태]

비석의 형태는 방형(方形) 대석에 비신과 이수(螭首)를 일석으로 만든 모습이며, 이수에는 화문이 양각되어 있고, 전체 높이는 125㎝이다.

[금석문]

비문은 비신 중앙에 '관찰사심공의신영세불망비(觀察使沈公宜臣 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음성 지방에 있는 관찰사의 비석으로, 많은 이들의 왕래가 있는 향교 앞에 세웠으며 지붕돌이 아닌 이수로 만들어졌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민치상(閔致庠)[1825~1888]의 치적을 기리는 비(碑).

[개설]

민치상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경양(景養), 호는 하당(荷堂), 본관은 여흥이다.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5대손이며, 민용현(閔龍顯)의 아들이다. 1845년(헌종 11) 생원이 되었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49년(철종 1) 홍문관수찬에 등용되었고 사은겸세폐사(謝恩兼歲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철종이 죽은 뒤 영의정 김좌근(金佐根)과 함께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의 전교(傳敎)를 받들고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을 잠저(潛邸)로부터 궁궐까지 봉영(奉迎), 시위(侍衛)하였다. 후에 이조참판을 거쳐,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 형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위치]

현재 2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1870년(고종 7)에 세운 비는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고, 1873년(고종 10)에 세운 비는 금왕읍 무극리 금왕읍사무소 앞에 있다.

[형태]

향교 앞의 비는 비신(碑身)의 높이 129㎝이며, 앞면의 폭이 52㎝, 측면의 폭이 16㎝이다. 금왕읍의 비는 비신(碑身)의 높이가 158㎝, 앞면의 폭 52㎝, 측면의 폭 28㎝이다.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52㎝, 앞면 92㎝, 측면 68㎝이고, 방부(方趺)는 높이 2㎝, 전면 90㎝, 측면 50㎝이다.

[금석문]

향교 앞의 불망비에는 ‘도순찰사민공치상영세불망비(都巡察使閔公致庠永世不忘碑)’라 쓰여 있다. 금왕읍의 비는 ‘관찰사민공치상영세불망비(觀察使閔公致庠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고을의 쌀을 내고 들이는 것으로 읍민들을 다스려 은택을 베풀었고, 편전의 근시로 사직에 정성을 다하니 훌륭한 명성이 세상에 전해진다네(俾邑糶糴 治民惠澤 輸社便近 傳世令聞)’ 라는 송시(頌詩)를 기록하고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주목사 이국헌의 선정비.

[개설]

이국헌(李國憲)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문숙(文叔)이다. 부친은 이여연(李汝淵)이다. 1660년(현종 1) 증광시(增廣試)에 생원 3등 45위로 입격하였다. 1676년(숙종 2) 호조정랑(戶曹正郞), 문의현령(文義縣令), 부사과(副司果), 이듬해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역임했다.

1683년(숙종 9) 부사직(副司直), 1684년 밀양부사(密陽府使), 상의첨정(尙衣僉正), 무주부사(茂朱府使), 1685년 남양부사(南陽府使), 1687년 훈련주부(訓鍊主簿), 1689년(숙종 15) 충주목사(忠州牧使)에 부임하였다. 선정비는 1691년(숙종 17)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형태]

묘갈형 비신으로 위가 넓고 아래가 좁다. 상단은 둥글게 처리하였고, 높이는 115㎝이다.

[금석문]

선정비 중앙에 '목사이국헌송덕영세불망비(牧使李國憲頌德永世不忘碑)'라 쓰여 있다.

 

 

[정의]

조선 중기 음성현감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응용(應龍)·응기(應祈). 옹몽진은 순창옹씨 시조이다.

[활동사항]

원래 옹몽진의 선조는 고려 때 교목세신(喬木世臣)의 거족이었으나 조선 개국에 반대하여 이성계의 미움을 받아 서인이 되었다. 옹몽진음성향교지기를 지내다가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56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7년 판관에 이르러 음성현감에 부임하여 고을 선비 류눌(柳訥)과 백성의 숙폐(宿弊)를 상의하고 손수 진두(陳頭)에 서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 결과 종래와 같은 과중한 부역을 감하고 민의에 의한 시책을 펼쳐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후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상훈과 추모]

옹몽진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자 고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향교 앞에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높이 158㎝로 재료는 화강암이다.

[묘소]

묘소가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현감 이세근의 선정비.

[개설]

이세근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성진(聖珍)으로 이지걸(李志傑)의 아들이다. 1697년(숙종 23) 문과정시 을과 2위로 합격하였다. 1699년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과거 파방(罷榜)에 대한 상소로 말미암아 음성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707년(숙종 33) 정언, 교리, 수찬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충청도감사, 경상도감사, 대사헌에 이르렀고, 17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성조갱장록(聖朝羹墻錄)』을 지었다. 선정비는 1701년(숙종 27)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형태]

나선형의 문양이 조각된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이수에서 턱을 이루어 비신과 구분하였다. 전체 높이는 143㎝이다.

[금석문]

선정비 앞면에 '현감이후세근청백덕정불망비신사사월일(縣監李侯世瑾淸白德政不忘碑辛巳四月日)'이라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현감 이종청의 선정비.

[개설]

이종청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일(仲一)로, 서울 태생이다. 부친은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 이위달(李渭達)이다. 1837년(헌종 3) 식년시 진사(進士) 3등 27위로 입격하였다. 1844년(헌종 10)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으로, 이듬해 음성현감에 부임하였다. 선정비는 1849년(헌종 15)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형태]

비갈형의 돌을 통째로 사용하여 상단 부분을 삼각 꼴로 만들고, 원형의 장식을 하였다. 상단과 비신을 구획한 뒤 앞면에 선정비문과 건립 연대를 적었다. 전체 높이 130㎝이다.

[금석문]

비신 앞면에 '현감이후종청애민선정비(縣監李侯鍾淸愛民善政碑)'라 쓰여 있고, 도광(道光) 연간의 건립 연대를 기록하였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현감 이숭운의 선정비.

[개설]

이숭운의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사진(士鎭), 호는 존암(存庵)으로 서울 태생이다. 부친은 성균관사성 이수덕(李壽德)이다. 1759년(영조 35) 식년시 진사 3등 30위로 입격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현릉참봉, 1781년(정조 5)에 음성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783년 사형수를 놓친 죄로 파직되었다. 1784년(정조 8) 정시문과에 병과 11위로 급제한 뒤 이듬해 정언(正言),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선정비는 1785년(정조 9)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형태]

네모꼴의 비신에 상단이 다소 과장되었다. 비신은 턱을 이루며 점차 좁게 내려온다. 높이는 145㎝이다.

[금석문]

비신 중앙에, '현감이후숭운청덕애민흥학활기거사비세재을사사월(縣監李侯崇運淸德愛民興學活飢去思碑歲在乙巳四月)'이라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현감 성규주를 기리는 비.

[건립경위]

성규주순조 때에 음성현감으로 애민선정(愛民善政)을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하여 불망비를 세웠다.

[위치]

성규주 불망비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충주로 가는 구 도로를 따라 1㎞쯤 올라가면 음성향교가 나오는데 그 앞에 있다.

[형태]

비석은 이수(螭首)를 얹은 것처럼 표현하기 위해 화강암 1매석을 요철을 주어 구분한 모습이며 전체 높이는 122㎝이다. 전면 중앙에 세로 한 줄로 비문을 새겼으며 뒤쪽에는 아무런 글도 적혀 있지 않다.

[금석문]

비문은 “縣監成侯○○愛民善政碑(현감성후○○애민선정비)”라고 음각되어 있다. 이름이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으나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의 선정비의 모습과 비교할 때 현감 성규주의 불망비인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성규주 불망비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 1기가 있고, 이곳에 1기가 있어 주목되나 2기 모두 시대를 구별할 수 없게 마모되어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현감을 역임한 권철인(權徹仁)의 선정비.

[건립경위]

권철인은 1844년(헌종 10)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을 거쳐 음성현감에 부임했다가 1851년(철종 2) 7월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권철인 혜휼군민선정비는 재직시인 1850년(철종 1)에 세운 것이다.

[위치]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음성향교 앞쪽에 다른 선정비들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형태]

비는 위가 둥근 비갈형이고, 전체 높이는 95㎝이다.

[금석문]

선정비의 앞면 중앙에 '현감권후철인혜휼군민비(縣監權侯徹仁惠恤軍民碑)'이라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현감 정현석의 선정비.

[개설]

정현석철종 대의 음성현감이었으며,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비문으로 보아 음성현감 재직 때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정비는 1860년(철종 11)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형태]

총 높이는 129㎝이며 비신과 개석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碑身)은 높이 98㎝, 앞면 51㎝, 측면 11㎝이고, 개석(蓋石)은 높이 31㎝, 앞면 52㎝, 측면 15㎝이다.

[금석문]

비 앞면에 '현감정후현석애민흥학영세불망비(縣監鄭侯顯奭愛民興學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조선 후기의 음성현감 이연긍의 선정비.

[개설]

이연긍은 1858년(철종 9) 현륭원참봉(顯隆園參奉)을 거쳐 1865년(고종 2) 음성현감에 부임했다. 1866년에는 안산군수(安山郡守)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867년 4월 공충도암행어사(公忠道暗行御史) 홍철주(洪澈周)가 올린 글에 음성현감 재직 때 백성들의 송사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이서를 바로잡아 폐단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태]

이수와 비신 일체형으로 위쪽의 양쪽 모퉁이를 잘라내었다. 위쪽 중앙에는 원형 장식을 배치하였다. 상단에서 단을 이루며 비신으로 이어진다. 전체 높이 135㎝이다.

[금석문]

비면 중앙에 '현감이후연긍청백애민선정비(縣監李侯淵兢淸白愛民善政碑)'라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현감 초징명의 선정비.

[개설]

선정비는 1868년(고종 5)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형태]

총 높이는 127㎝이며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91㎝, 앞면 45㎝, 측면 18㎝이고, 개석(蓋石)은 높이 91㎝, 앞면 45㎝, 측면 18㎝이다.

[금석문]

비신 앞면에는 '현감초후징명청덕선정비(縣監楚侯徵明淸德善政碑)'라고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현감 오병선의 선정비.

[개설]

오병선(吳秉善)은 1860년(철종 11)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을 거쳐 음성현감에 부임, 1870년(고종 7) 서산군수(瑞山郡守)로 자리를 옮겼다. 1873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부임했다. 선정비는 1866년(고종 3)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형태]

상단이 둥글게 처리된 묘갈형 비신으로, 높이는 115㎝이다.

[금석문]

선정비의 중앙에 '현감오후병선청백애민불망비병인시월(縣監吳侯秉善淸白愛民不忘碑丙寅十月)'이라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음성현감 송규복을 기리는 비.

[위치]

송규복 애민선정비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서 충주 쪽으로 가는 옛 국도 변에 위치한 음성향교 앞에 있다. 향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장소이므로 선정비나 불망비 등이 많이 세워져 있다.

[형태]

비석은 지붕돌이나 이수(螭首) 없이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일반형 석비로 화강암 1매석이며 높이 115㎝의 비신을 세웠다. 전면 중앙에 세로 한 줄로 비문을 새겼으며 뒤쪽에는 아무런 글도 적혀 있지 않다.

[금석문]

비문은 '현감송후규복애민선정비(縣監宋侯圭復愛民善政碑)'라고 음각되어 있다. 간기로 보아 1881년(고종 18)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음성현감 이철응의 선정비.

[개설]

이철응은 조선 고종 때 음성현감을 지냈다. 그 외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선정비는 1885년(고종 22)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형태]

1단 비석으로 비신(碑身)의 총 높이는 114㎝이며, 앞면의 폭은 42㎝, 측면의 두께는 16㎝이다.

[금석문]

비신 앞면에는 '현감이후철응애민선정비(縣監李侯哲應愛民善政碑)'라고 쓰여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위치하고 있는 윤필 불망비의 모습이다.

윤필은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고종 33년 2월 20일 [양력4월2일] 을유 4/8 기사 1896년 開國 505년 光緖(淸/德宗) 22년....寧遠郡守安瀷, 陰城郡守尹泌, 谷山郡守鄭誾朝, 仁同郡守李奎白, 錦山郡守李奎文, 依願免本官...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음성군수 이해용의 기념비.

[개설]

이해용은 보성전문대출신으로 1927년에 음성군수를 지낸 뒤 1929년에는 제천군수,1930년에는 괴산군수,32년에는 영동군수를 지내는 등 충북지방의 여러 곳에서 군수직을 했다.비석의 건립시기는 음성군수를 마친 해인 1929년이다.

[형태]

전체 높이는 182㎝이며 비신(碑身)은 높이가 129㎝, 앞면의 폭 50㎝, 측면의 두께가 22㎝이다.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53㎝이며 앞면의 폭은 79㎝, 측면의 두께가 58㎝이다.

[금석문]

비석 앞면에는 '군수이후해용청덕기념비(郡守李侯海用淸德紀念碑)'라고 쓰여 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 풍속을 바로잡고 인륜을 밝혔다네. 삼년 동안 정사를 보면면서 온 고을에 인을 이루었다네(愛民□□ 救俗明倫 三載爲政 萬家百仁)'이라고 쓴 송시(頌詩)가 있다.

 

 

[정의]

청주시의 행정가.

[가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에서 채성용(蔡成用)과 김순임(金順任)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청주시 총무과장을 거쳐 보은, 옥천, 음성, 청원군수를 지냈다. 보은군수를 지낼 때는 말티재 도로를 넓히고 정비하였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청주시장을 재임하는 동안 1971년 무심천(無心川)에 벚꽃나무를 심고, 우암산 우회도로를 만들었다. 충청북도체육관 남쪽 도로를 확장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청주 방문 후에, 청주시의 중심에 있던 동네와 요정을 헐고 상당공원을 만들었다.

한편, 천주교측에서 시내에 조성하려던 공원묘지를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에 만들게 하였다. 그는 특히 가난한 시민들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공직생활 후 대한지적공사 충북지사장으로서 부임했을 때도 부하 직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공덕비]

그가 군수로 있던 음성과 보은에 현재 그의 공덕비가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유학자 정조헌(鄭祖憲)을 기리는 비.

[개설]

음성향교 전교(典校)였던 정조헌(鄭祖憲)의 본관은 초계이며, 자는 성륜(聖倫)이고, 호는 구봉(九峯)이다. 시조 광유후(光儒候)의 31세손이고 효자 위은 정인상(鄭寅尙)의 아들로, 어머니는 효부 현풍곽씨이다. 정조헌은 평생 윤리와 도덕을 몸소 실천하고 유도(儒道) 진흥에 심신을 바쳤다.

이렇게 평생 유학 진흥에 공헌한 것을 인정받아 1984년 11월에
음성향교 앞에 정조헌의 공적을 기리는 존성비를 세웠다. 신재 이수원이 제문을 지었고, 『신재집』에 이수원이 정조헌을 위해 지은 시가 몇 수 있다.

[형태]

총 높이가 230㎝인 석재 비석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전교정공조헌존성비(典校鄭公祖憲尊聖碑)'라고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조동환의 비.

[개설]

조동환의 자는 문옥(文玉), 호는 정암(靜岩)이며,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음성읍 평곡리에서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趙大妃)와 혈연 관계가 있어, 1910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에 기용되었고 강원도 춘천재무소 주사가 되었다. 1928년부터 2년간 음성면장을 지냈고, 1931년 음성면장에 재임되었다. 그 후 충청북도 평의원(評議員)을 세 차례 지냈다.

[형태]

비신과 개석 2단으로 되어 있는 비의 총 높이는 189㎝이다.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131㎝, 앞면 폭 57㎝, 측면 폭 25㎝이고,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53㎝, 앞면 폭 88㎝, 측면 폭 60㎝이다.

[금석문]

비석 앞면에는 '음성면장조동환기념비(陰城面長趙東渙紀念碑)'라고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변중기의 기념비.

[건립경위]

변중기 기념비는 1930년대 읍내리 1구장을 역임한 변중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이다. 변중기읍내리 1구장 역임 이외의 행적은 미상이다. 비는 1936년에 세워졌다.

[형태]

비신(碑身)의 총 높이는 119㎝이며, 앞면의 폭 41㎝, 측면의 두께 15㎝이다.

[금석문]

비석 앞면에는 '읍일구장변중기기념비(邑一區長邊重基紀念碑)'라고 쓰여 있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의 구장 남궁은의 송덕비.

[형태]

묘표형의 비석으로 가첨석은 없다. 전체 높이는 119㎝, 앞면 폭 46㎝, 측면 폭 19㎝의 규모이다.

[금석문]

비신 중앙에 '삼구장남궁은송덕비(三區長南宮恩頌德碑)'라 쓰여 있고, 왼쪽에 송덕 사실을 4언시로 옮겨놓았다. 사언시의 내용은 “십년 간을 부지런히 근무하였으니 좋도다 그 말씀이여! 사사로운 이익을 버리고 공의를 취하였으니 모두가 그 덕을 송축한다네(十載勤務 善哉其言 捨利取義 咸頌厥德)”라고 기록한 송시로, 남궁은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다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사업가.

[활동사항]

오주영은 조선 인조(仁祖) 때 영의정을 지낸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의 11세손이며 오극선(吳克善)의 아들이다. 2세 때 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 신청리로 이사하고 1920년 12세 때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花洞)으로 이사하였으며, 1921년에는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고내리로 이사하였다.

1922년 14세 되는 해에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음성개량학교 4년과 서울중동학교 속성과 1년을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의 검정고시를 거쳐 17세 때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너그럽고 후하여 젊어서 명예를 얻기보다는 고장에 정착하여 스스로 도정업 등 실업에 종사하며 근면 성실과 검소를 바탕으로 남에게 널리 베푸는 생활을 하였다. 또한 고장의 어려운 일과 분쟁에는 정을 베풀어 해결을 하였고, 일제강점기, 광복, 6·25전쟁 등의 혼란기에는 사재(私財)로 구휼하였다. 일상을 불우한 학생과 어려운 이의 뒷바라지에 바쳤다.

[상훈과 추모]

1982년 12월 4일 문학박사 조건상(趙健相)이 찬하고 지역 주민의 뜻을 모아 민간단체협의회에서 세운 송덕비가 있다. 묘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문산리에 있고 송덕비 내용은 “끼치온 덕(德) 두터우니 공(公)의 도량(度量) 넓었을 걸/ 평생 두고 넓은 자취 누구에게도 무던했네/ 비에 담긴 서툰 글로 어찌 다 할까만/ 돌에 새겨 우러르니 갸륵한 일 놀라우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