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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문화재 (264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이 효자각은 1927년에 시종원경(侍從院卿) 송즙수(宋楫洙, 1846∼1911)의 효행을 기리어 그의 후손인 은진송씨(恩津宋氏) 문중에서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효자각은 1962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효자문 편..
청원군 부용 출생인 김종오 대장은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중부전선에서 한국군이 당하고 있던 수세 일변도를 뒤집어 놓은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6사단장으로 한국 전쟁사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당시 백마고지전투는 10일 동안 12번의 공방 전 끝..
이 효부각은 1933년에 임노훈(林魯訓)의 처 이옥골(李玉骨, 1864~1943)의 효행을 기리어 부안 임씨(扶安林氏) 문중에서 세운 정려이다.지금의 효부각은 1971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효부문 편액을 걸었으며, 밖에는 "효부지려(孝婦之閭)"라 쓴 현판을 달았다.찾아갔을때는 단청도 새로 칠했고 잘 관리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열녀각이나 효자각등이 많이 퇴색되여 있는데 문중에서의 관리가 잘 된 듯 하다 안내판에 의하면 시부모에 대한 효가 생전이나 사후나 한결 같음에 문중에서 효부각을 세웠다.
초계변씨(1877~1939)는 평강인 전재우에게 시집와 부도를 지키며 길쌈으로 가업을 삼았다. 또한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남편을 공경으로서 받들었다. 시아버지가 병을 얻어 자리를 보존하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달여서 올렸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돌아기시자 예의로서 삼년상을 모셨다. 그 후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5년간을 머리를 빗기며 의복과 이불을 빨아 입히고 덮어 주었다. 상을 당하지 시아버지 때와 같게 하였다.불행이 겹쳐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오랫동안 병석에 눕자 밤낮으로 옆에서 수발을 들었으며 밤이면 북두칠성에게 기도하고 아침이면 초정약수를 길어다 미음을 끓여 간호하였다. 남편이 죽은후에도 자식들을 잘 키워 의로운 방향으로 교육을 시켰다.비석은 1975년에 세웠다. 비석의 전면에는 절효부초계변..
이 효자각은 조선 선조 35년(1602)에 초계인(草溪人) 백음(栢陰) 변경복(卞景福, 1538~1629)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효자각은 1930년에 중건하고 1988년에 같은 마을에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