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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곡동 박민준 묘비(石谷洞 朴敏俊墓碑) 본문

통합청주시/흥덕구(興德區)

석곡동 박민준 묘비(石谷洞 朴敏俊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8. 27. 11:16

 

 

 

 

 

 

 

 

 

 

 

 

 

 

 

 

 

 

 

 

 

 

 

 

 

 

 

박민준 묘비에 대하여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석곡동에 있는 박민준(朴敏俊)[1676~1744]의 묘비.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공적을 세운 박민준의 묘비로 1859년(철종 10)에 세웠다.

청주에서 청원군 부강으로 가는 서부도로충북공업고등학교 부근의 오른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186㎝, 폭 63㎝, 두께 37.5㎝이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가첨석(加檐石)을 얹었다.

 

비의 제목은 “揚武一等功臣 贈 通訓大夫 司憲府持平 朴公敏俊之墓(양무일등공신 증 통훈대부 사헌부지평 박공민준지묘: 양무일등공신증통훈대부사헌부지평 박민준의 묘) 淑人和順崔氏 祔右麓(숙인화순최씨 부우록: 숙인화순최씨(和順崔氏) 오른쪽에 있다) 繼配李氏墓 在北面金川(계배이씨묘 재북면금천: 죽은 후실 이씨의 묘 북쪽 금천에 있다)”이다.
비문은 송근수(宋近洙)가 짓고 8대손 박종한(朴鍾漢)이 썼다. 묘비 오른쪽에는 1986년 송해석(宋海碩)이 국한문혼용체로 지은 ‘원비해석문(原碑解釋文)’을 높이 96㎝, 폭 138㎝, 두께 33㎝의 방형(方形)의 오석(烏石)에 새겨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그의 형 박민웅(朴敏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상당산성(上黨山城) 북장대(北將臺)에서

 이인좌의 동생 이기좌(李麒佐)를 참살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공로로 ‘양무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는 것이다.

 

국가기강을 문란케 한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소집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반란군의 핵심인물을 참살한 의기와 용맹성은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선비가 취해야 할 도리와 자세를 각성하게 한다.

 

 

박민준에 대하여

 

조선 후기의 창의 인물.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언백(彦伯)이다.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의 아우이고,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박원진(朴元震)이다.

임진의병장 박춘번(朴春蕃)의 현손이다.

 

청주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여 무예가 뛰어났으나, 무과에 등과하지는 못했다.
1727년(영조 3)에 어사 김시형(金始炯)이 역사(力士)로 천거하였으나 탁용(擢用)되지 못했다.
이듬해인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일명 무신란)이 일어나 목사(牧使) 박당(朴鏜)은 도피하고 우후(虞侯) 박종원(朴宗元)은 성을 내주고 투항하니

역도의 무리들은 이인좌를 대원수라 칭하고, 신천영(申天永)은 병사(兵使), 권서봉(權瑞鳳)은 목사로 가칭하여 청주를 쉽게 점령해 버렸다.

이에 창의한 형을 따라 선봉이 되어 청주 진영에 머물고 있던 적들을 베고 산성으로 향하여 성내로 쳐들어 가 역도(逆徒)들을 크게 무찔렀다.
상당산성 북장대로 도주하던 역당들 중에서 이인좌의 아우 이기좌(李麒佐)를 쫒아 목을 베었다.

난을 평정하는 데 있어 형 박민웅과 함께 공이 매우 컸다.

1728년 호서좌도소모사(湖西左道召募使) 유숭(兪崇)의 장계에 의해 포상이 내려졌다. 1744년 7월 21일에 죽으니 향년 6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