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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면 법주사벽암대사비(俗離山面 法住寺碧巖大師碑) 본문
법주사의 절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벽암대사의 행적을 적고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7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벽암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이며, 벽암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키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조 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현종 1년(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넓직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이 얹은 모습이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운 것으로,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이다.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렀던 고승들은 젇지 않으나 특히 벽암 각성스님은 기억해야 할 고승이다.
그의 행적이며 후세에 미친 영향은 법주사에 있어서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기억해야할 인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조선불교에서 서산대사가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인 것이고 특히 임진왜란을 통해 보여준 그의 역할은 막중한 것이였다
벽암 각성은 마치 병자호란에 서산대사라 할만큼 뛰여난 행적을 보여준 분이기 때문이다
그가 임진왜란때 맹활약을 하였던 송운 사명대사 다음으로 팔방도종섭국일도대선사의 직을 이어받은 사실은
그의 이러한 행적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볼수있다
이 벽암대사의 비는 법주사로 들어가기직전 수정교 못미쳐에 있다.
이 비문에 있는 내용과 한국 불교사를 근거로 그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그의 법명은 각성이고 호는 벽암이다
출생지는 충북 보은이며 그 선조들은 역대로 벼슬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보은에 거주하였다
어느날 점술가가 그의 집터를 보고는 아들이 태여아면 대사문(고승을 일컫는 말)이 될 것으로 예연하였다
어머니 조씨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부부가 북두칠성에게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바로 벽암각성이다
벽암은 선조8년 12월에 태여났다
9세에 아바지를 잃고 10살 되던해애 화산에 들어가 설묵장노에게 출가했고 14살이 되자 보정대사에게 삭발을 하고 구족계를 받고 불교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부휴대사가 화산에 들어와 그를 한번 보고는 큰 그릇이 될 인물임을 알았다
이때부터 그는 부휴를 스승으로 삼고 함께 속리산으로 가서 용맹정진 수도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휴대사가 전쟁에 참가하자 그도 해전에 참여하였다
부휴대사가 가야산에 들어와 있을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이 해인사를 지나가다가 벽암을 보고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조 33년 칠불사에서 하안거를 하고 있을때 부휴대사가 병을 앓게 되자 강석을 벽암에게 물려주었다
벽암이 등좌하여 토론하니 그의 강좌는 모든 사람을 감복시켰다
병오년(1606년)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속리산 가섭암에 들어가 정진하면서 어머니 명복을 비는 효행을 보이기도 했다
인조2년(1624)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축조하려 할때 스님에게 팔방도총섭의 지위를 주어 승군을 이끌고 축성의 일을 맡게했다
3년간 걸린 이 노역을 마치자 나라에서는 보은 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의 직위를 내리고 동시에 의발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군이 침입하여 서울에 이르자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스님은 삼천의 승군을 모집하여 항마군이라 명명하고 호남관군과 함께 스스로 의승대장이 되여 북상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벽암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641년 6월 조정에서는 과거에 송운대사에게 맡겼던 소임과 같이 벽암대사를 일본으로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서울로 향하던 도중 노구와 병으로 포기하지 않을수 없게 되여다시 백운산 상선암에 들어가 버렸다
1642년 보개산으로 들어가 법석을 베풀었다. 효종이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에 벽암은 안주에서 효종을 만나 함께 화엄의 종지를 담론하고
왕은 크게 찬탄하여 후하게 시여하였다
1646년(인조24)가을에 속리산으로 다시 들어왔다
동문의 제자인 고한 희언과 가까이 우거하며 아침저녁으로 서로 도담을 즐겼다
고한이 화엄사로 들어가 입적하지 벽암도 화암사로 들어가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평생 무(無)자의 화두를 들고 사람을 대할때는 공손했으며 고독하고 병든사람을 보면 구호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현종1년 1월 세수86세 법랍73세 되던 해에 앉은 자세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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