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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초대현감 옹몽진유애비(陰城 初代縣監 邕夢辰遺愛碑) 본문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초대 음성현감 이야기.
「음성 초대현감 옹몽진」은 음성현의 초대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의 존경을 받았던 옹몽진(邕夢唇)과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옹몽진은 조선 중기 명종 때의 사람으로 순창옹씨 시조이기도 하다.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음성향교 앞뜰에는 역대 현감과 군수, 읍면장들의 공덕비가 열을 지어 서 있는데, 그중에 가장 오래된 비가 바로 초대 음성현감 옹몽진의 선정을 기린 유애비(遺愛碑)이다.
음성군 전역에서 널리 전해 오는 이야기로, 1982년에 출간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음성군-』과 2005년에 출간한 『음성의 구비문학』에 수록되어 있다.
옹몽진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부지런하였다. 어느 날 향교 앞을 지나가는데, 학동과 선비들이 글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까막눈이 되어서는 안 되지. 무언가 많이 배워서 입신은 못하더라도 저 향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처럼 글을 알아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하고는 글 배우기를 결심하였다.
그날부터 옹몽진은 향교에 들어가서 낮에는 향교에 딸린 논밭일을 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혼자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나오면 표시해 두었다가 선비나 학동들에게 물어서 배우니 학문이 일취월장이었다. 그렇게 공부하기를 얼마 후, 한다 하는 선비들도 감탄하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시험삼아 향시에 응시하여 쉽게 급제하고 이어 복시에도 합격한 뒤 문과에도 급제한 옹몽진은 향교의 고직일을 맡아 보면서 관직이 제수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조정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다시 중과시를 보았는데 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제수되지 않았다.
하루는 봄철이라 고직녀와 밭을 갈고 있는데, 한양에서 남쪽 보은으로 부임하는 신임 사또의 행차가 지나간다. 앞서가는 길라잡이가 “이리 비켜라! 저리 비켜라! 사또님 행차시다!” 벽제 소리도 요란하니 위세가 당당하였다. 옹몽진이 보고 있자니 배알이 틀렸다. 고직녀를 불러서는, “가서 신임 사또한테 신임하례를 들이게 하라.” 하였다.
고직녀가 그 뜻을 전하니 신임 사또가, “나는 중시에 급제한 사람이니 그럴 수 없다고 일러라.” 한다. 옹몽진은 그 말에, “중시에 급제한 사람이 어찌 사또뿐이랴. 나는 중증시에 급제하였으니 어서 신례를 들이도록 일러라.” 하였다. 그 말이 사또에게 다시 전해지자, “나도 중증시에 급제했으니 그럴 수 없다고 여쭈어라.”한다.
일이 이쯤 되니 옹몽진은 좀더 화가 올라서, “허, 중증시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먼저이니 어서 신례를 드리라 일러라.” 하였다. 이 말에 신임 사또는 깜짝 놀라서 멍석과 차일을 펴게 하고 옹몽진을 상석에 모신 뒤 엎드려 절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시와 학문을 논하니, 금방 시간이 지나갔다. 마침내 신임 사또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 신임 하례를 받았으니 답례를 해야 할 텐데, 들판 한가운데에 있다 보니 줄 만한 것이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는데 조금전까지 밭을 갈던 황소가 쟁기줄에 매어 있다. 옹몽진은 옳다 싶어서, “내가 신례를 받았으나 답례할 것이 마땅치 않아 이 황소를 드리니 팔아서 비용에 쓰시오.” 하고 아낌없이 선사하였다. 그 후 두 해 뒤에, 그때의 보은군수는 내직으로 들어가 승정원 승지일을 맡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임금이 승정원에 납시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외직에 있던 일을 하문받자 옛 보은군수는 문득 옹몽진과의 일이 생각나, 옹몽진의 인물 됨됨이와 박학다재한 학문을 칭찬하며 그의 불우한 처지를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임금은 옹몽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 기별을 넣어 옹몽진에게 상경하도록 명을 내렸다. 옹몽진은 갑작스런 명에 부랴부랴 차비를 하고 4~5일 길을 재촉해서 대궐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수문장이 보아하니, 옷은 남루한데다 말씨도 촌스럽고 부들부들 떠는지라 잡상인이라 생각하고 소리를 꽥 질러 쫓아 버렸다.
옹몽진은 저만큼 쫓겨났다가 정신을 가다듬고는, ‘상경하라’는 임금의 증표를 수문장한테 내보였다. 그제야 수문장이 깜짝 놀라면서, “아니, 왜 진작 증표를 보이지 않고 떨고만 있었소.” 하면서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하여 임금 앞에 부복하고 배알하니, “네 소원이 무엇인고?” 하고 하문하였다. 생전 처음 임금 앞에 나아간지라 부들부들 떨렸으나 워낙 우직한 성품인지라, “소인은 평생 음성향교의 고직이오니 그리 하렴하여 주사이다.” 하니,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임금은 옹몽진의 순박하고 꾸밈없는 마음씀과 재질을 귀중하게 생각하여 음성현감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옹몽진에게만은 임기를 적용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현감을 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그러고는 당시에는 음성에 고을이 설치되지 않았을 때여서, 충주목에 명하여 동면과 서면·남면을 떼어 음성현을 설치토록 하고 초대 현감으로 옹몽진을 앉혔다.
그때 군내의 부역이 심하고 빈민이 많아서 민심을 수습하고 군정을 정돈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옹몽진 현감은 군내의 유력한 인사인 유눌(柳訥)을 불러서 군행정의 방법을 상의하고 손수 선두에 서서 선정을 베푸는 데 힘을 썼다. 무엇보다 무거운 세금을 줄이고 백성의 뜻에 따라 시책을 하나씩 시행해 나가니 백성들이 안심하고 부지런히 생업에 힘써 곡식이 창고에 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은 격양가를 부르고 글방에서는 글소리가 높으니 군민 중에 옹현감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고, 옹현감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옹현감이 나이 들어 죽자, 그 덕을 기리기 위하여 군민의 이름으로 유애비를 세웠다고 한다.
「음성 초대현감 옹몽진」은 음성현의 초대 현감으로 선정을 쌓은 실존 인물 옹몽진과 관련한 이야기가 민간에 구전되다 설화로 굳어진 경우이다. 이야기의 전반부에는 가난한 총각 옹몽진이 입신양명하기까지 노력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입신한 후의 후반부는 옹몽진이 군정의 잘못을 바로잡고 백성을 사랑하는 덕망 있는 지방 관리로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중기 음성현감을 역임한 문신.
원래 옹몽진의 선조는 고려 때 교목세신(喬木世臣)의 거족이었으나 조선 개국에 반대하여 이성계의 미움을 받아 서인이 되었다. 옹몽진은 음성향교지기를 지내다가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56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7년 판관에 이르러 음성현감에 부임하여 고을 선비 류눌(柳訥)과 백성의 숙폐(宿弊)를 상의하고 손수 진두(陳頭)에 서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 결과 종래와 같은 과중한 부역을 감하고 민의에 의한 시책을 펼쳐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후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옹몽진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자 고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향교 앞에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높이 158㎝로 재료는 화강암이다.
묘소가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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