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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종곡리 의령남씨 효부문(報恩邑 鍾谷里 宜寜南氏 孝婦門) 본문
경주인 김극태의 처인 의령남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5년(1867년)에 나라에서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여 그가 살던집 대문에 편액하였던 정문이다.
정려건축은 마을입구에 독립된 목조정각으로 세워지는 경우와 가옥의 대문간을 정려로 하는 2가지 유형이 있는데 의령남씨 효부문과 같이 가옥의 대문을 정문으로 하는 경우는 충북지역에서는 흔치않는 유례이다.
현재는 집은 없어지고 편액이 걸린 대문만 보존되고 있다.
대문은 정면 3칸 측면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1칸은 솟을대문이고 양측의 1칸씩은 행랑으로 온돌방을 시설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구조는 낮은 시맨트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위에 방형의 기둥울 세웠다.
현재 "효부사인김극태처의령남씨지문(孝婦士人金極泰妻宜寜南氏之門)이란 명정편액이 솟을대문 중앙상부에 걸려있다.
남씨는 공섭의 딸로 효자 김기서의 아들 극태(極泰)의 부인으로 시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여 그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1867년 고종(高宗) 5년에 명정(銘旌)되었다. 상지5년이라 함은 왕위에 즉위한지 5년이란 뜻으로 상지5년 정묘4월이라함은 1867년 고종5년 4월을 뜻하는 것이다.
의령남씨 효부문 옆에 자리한 경주김씨 김기서의 효자문 에도 상지5년 정묘년 4월에 명정 된것으로 표기되여있다.
그렇타면 김기서의효자문과 의령남씨효열문이 같이 명정되였다는 이야기이다. 문헌에 의하면 의령남씨는 김기서의 며느리로 적혀있다.
다른 문헌에 의하면 경주 김씨 소유의 정문이며 효부 의령 남씨의 행적을 기리고자 세운 정문이다. 남씨는 공섭의 딸로 효자 김기서의 아들 극태(極泰)의 부인으로 시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여 그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1907년 고종(高宗) 44년에 명정(銘旌)되었다.
의령남씨가 김기서의 며느리였으므로 어느정도의 신빙성이 있는 말이다.
김기서의 정려가 고종5년이면 의령남씨의 정려는 고종44년이 어느정도 맞는것 같다.
그런데 왜 정려에는 같은 날자로 표기되여 있는것일까?
그 후의 후손들이 정려문을 손을 보면서 혹여나 오기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확한 연대에 대하여 알수가 없으니 또한 많은 궁금증이 있다.
관공서에서 발행되는 책에도 명정날짜가 200여년이상 오류가 나는것이 있으니 어떤것이 맞는것인지 많이 궁금하다
정려날자에 오기여부도 중요하겠지만 그만큼 시대를 유지하고 효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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