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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봉황리 김익경애민청덕비(內北面 鳳凰里 金益慶愛民淸德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내북면 봉황리 김익경애민청덕비(內北面 鳳凰里 金益慶愛民淸德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10. 11. 19:47

 내북면 봉황리 마을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군수 김익경의 애민청덕비이다.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자리인지는 알수가 없으며 마을초입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아래 마을자랑비옆에 위치하고 있다.

군수 김익경에 대해서는 자세한 자료를 찾을수가 없다.공적비에는 앞면에는 군수김후익경애민청덕비(郡守金侯益慶愛民淸德碑)라고 음각되여 있으며

비석의 뒷면에는 비를 건립한 일자인 신축구월(辛丑九月)이라 음각되여 있다.비의 대석은 자연석을 이용해서 대석에 홈을 파서 비를 세웠다

 

처음 방문했을때는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는데 이번 방문길에는 왠일인지 비석이 넘어져 있다

무슨 일인가 동네주민들에게 여쭈니 옆에서 교량공사를 하던 중장비가 후진을 하다가

저리 되였다고 한다 원상복구를 약속했는데 지금쯤은 제자리를 다시 찾았겠지?



군수 김익경은 승정원일기를 참조하면 고종37년 (1900년)에 청산군수(靑山郡守)로 移拜(이배)된다.

그후 고종 38년(1901년)다시 청산군수에서 진잠군수로 임지를 옮기게 된다 , 선정비는 이 시기인 신축년 (1901년)에 세워졌다.


 

 

 

 

군은 우리나라의 지방행정구역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행정단위이다. 이미 신라시대인 6세기에 군이 설치된 기록이 있었으나, 당시는 최고책임자를 태수(太守)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지사(知事)라 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1412년(태종 13) 비로소 군수라는 직명을 사용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종전의 군이 부(府)와 군으로 구분되고, 군수는 인구가 많은 지역은 관할하지 않게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지방자치법」에서 군을 지방자치단체로 규정하지 아니하였고, 1961년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하여 군이 지방자치단체가 되었으나,

이 법에 의하여 군수는 계속 정부가 임명하도록 하여, 군수는 도지사와 시장 및 읍·면장과 달리 한번도 지방의회나 주민이 선출한 사례는 없다.

조선시대에는 종4품이었고, 민족항일기에는 주임관(奏任官)이었다. 정부수립 후에는 사무관으로 보하다가 1967년부터 인구가 많은 군은 서기관으로, 그 밖의 군은 1971년부터 서기관으로 보하고 있다. 그러나, 1995년 10월 지방자치법의 개정으로 주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군수 [郡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축년이라 하면 1841년/1901년/1961년을 칭한다

비의 상태나 짐작에 의하면 1901년이 가장 근접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고종시대사 5집
1903년(癸卯, 1903, 淸 德宗 光緖 29年, 日本 明治 36年) 7月 16日(木)
林川前郡守 金益慶 및 公州郡 居 盧欑·盧泰燮 等의 告訴에 따라 忠淸南道觀察使 洪承憲을 掌致하다.
[출전]
日省錄 光武 7年 閏5月 22日
官報 光武 7年 7月 22日
 
-신축년을 1901년으로 추정하면 위에 임천군수를 지낸 김익경의 애민청덕비에 한발 더 다가가게된다

 

 

 

 

 

후(侯)는 벼슬아치 특히 고을 사또[지방 장관]의 성(姓) 밑에 붙이는 존칭.

淳昌刺史南侯 爲政旣有餘暇 新作樓于客館之後

(순창자사남후 위정기유여가 신작루우객관지후 ;

순창자사 남 사또가 고을을 다스릴 때 이미 여가가 있어서, 객관 뒤쪽에 새로 누대를 지었다.)

<이색李穡 순창객관신루기淳昌客館新樓記>

[네이버 지식백과] [侯] (한시어사전, 2007.7.9, 국학자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