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괴산읍 괴산중학교공적비군(槐山邑 槐山中學校功績碑群)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괴산읍 괴산중학교공적비군(槐山邑 槐山中學校功績碑群)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5. 16. 19:41

 괴산중학교 교정에 자리하고 있는 비석들이다

비석을 바라보며 좌측으로 부터 조성철,유증수,김응규의 육영공적비이다.

학교를 지을때 건축위원장,또는 기성회장 및 학생들의 육영에 많은 공로가 있는 분들의 비석을 괴산중학교 입구에 세워놓았다.

 

 

 

 

 

 

김응규(金應奎) 1874(고종 11)~1953일제 강점기와 광복 시기의 효자이며, 육영사업가로 자는 치옥(致玉),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집안 사정이 가난하여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에게 효로써 봉양하는 도리(道理)를 스스로 깨우쳐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성장한 후 뜻한 바 있어 아는 사람으로부터 일금 1원 50전을 빌려 장사밑천으로 삼아 각 시장을 순회하며 장사를 시작하였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노력한 끝에 8년 만에 괴산읍내에 점포를 마련하였다. 그는 항상 손님을 온화하고 공손하게 대하였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폭리를 취하지 않았다. 이로써 점차 신용을 얻어 굴지의 큰 상인이 되고 자녀를 교육시키며 늙은 어머니에게 지성껏 봉양을 다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주색(酒色)을 멀리하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점포에서 일을 하면서도 늙은 어머니 봉양에 잠자리를 일일이보살피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게 되었을 때는 시탕(侍湯)에만 전념하기위해 점포도 처분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성으로 간병을 다하였다. 어머니는 90세 고령의
노환(老患)으로 천수(天壽)를 다하고 돌아가셨다. 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다하여 안장(安葬)한후에도 백발노구(白髮老軀)에도 불구하고 묘소를 찾아 청소하며 삼 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주위에서 모두 그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였고 괴산유림회(槐山儒林會)에서는 이를 표창하였으며각군의 유림들이 다투어 그를 찬양하는 시문을 보내와서 이를 모아『김효자천미록(金孝子薦美錄)』을 발간하였다. 이후 그동안 근검절약(勤儉節約)하여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결심을 하였다. 때마침 괴산읍내 명덕국민학교(明德國民學校)가 설립한 지 50년이 되어도 교실하나 증축하지 못하고 협소한 학교 땅을 확장해야 할 절박한 사정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소유하고 있던 400여 석지기 농지를 명덕국민학교에 희사(僖捨)하여 여유있는 곳으로 이전하여 교사를 신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후 괴산중학교가 설립되어 교사(校舍)를 신축하게되자 그는 다시 남은 전답 220석지기를 희사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가 천수(天壽)를 다하여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40년 명덕초등학교, 1953년 괴산중학교 교정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