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용관동 목사이국헌마애비(龍觀洞 牧使李國憲磨崖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용관동 목사이국헌마애비(龍觀洞 牧使李國憲磨崖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8. 5. 16:09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의 마애선정비이다

충주를 지나간 관리들의 많은 선정비를 보았지만 마애비로 선정비를 새긴경우는 드물다

수안보면 수회리에 마당바위에 서유돈불망비가 마애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와 비해 이국헌의 마애비는 많은분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국헌(李國憲)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문숙(文叔)이다. 부친은 이여연(李汝淵)이다. 1660년(현종 1) 증광시(增廣試)에 생원 3등 45위로 입격하였다. 1676년(숙종 2) 호조정랑(戶曹正郞), 문의현령(文義縣令), 부사과(副司果), 이듬해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역임했다.

1683년(숙종 9) 부사직(副司直), 1684년 밀양부사(密陽府使), 상의첨정(尙衣僉正), 무주부사(茂朱府使), 1685년 남양부사(南陽府使), 1687년 훈련주부(訓鍊主簿), 1689년(숙종 15) 충주목사(忠州牧使)에 부임하였다.

이국헌은 1689년(숙종 15년) 윤 3월 9일부터 1690년(숙종 16년) 9월 11일까지 약 1년 6개월여를 충주목사로 지냈다.

충주목사를 재임중 폭사하였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마애비는 충주시 용관동 관월정옆에 바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애비를 본뜬 새로운 비석을 마애비밑에 세워놓았다. 

 

이국헌 마애비는 바위면에 목사이공국헌애민선정비(牧使李公國憲愛民善政碑)라고 음각되여 있다.

1691년(신미)에 세워졌다. 용관동 산 19번지에 마애비 형태로 있다.

‘목사이공국헌애민선정비’라고 쓰고, 경오(1690), 신미(1691)라고 새겼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선정비의 내용을 기록한 새로운 비가 1992년 세워졌다

 

 

 

 

이국헌의 마애비를 보면서 관계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이국헌의 의문의 죽음후에 충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 엄찬이다.

엄찬은 조선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이다.

1693년(숙종 19) 충주목사겸충주진관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전임 충주목사 이국헌(李國憲)이 갑자기 죽음을 당하자,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의심스러운 여섯 사람을 가두었다. 그런데 이국헌의 후임으로 온 충주목사 엄찬까지도 꾸짖고 욕보이자, 엄찬이국헌의 아들을 곤장으로 때리다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엄찬은 충주목사에서 체임되고, 이 일로 경연(經筵)에서 논의가 있었는데 이현일(李玄逸)엄찬의 치적을 두둔하여 주었으므로 그대로 유임되었다. 1702년(숙종 28) 청주목사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화장되었다.

1694년(숙종 20) 충주 지역 사람들이 세운 목사엄후찬청덕휼민선정비(牧使嚴侯纘淸德恤民善政碑)충청북도 충주시 달천동 달천교 옆에 세워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19년에 이르면 이국헌과 엄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강(朝講) 때 충주(忠州)의 죄수를 경옥(京獄)에 잡아와서 엄중히 국문하여 처단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충주 아전들의 습속이 매우 사나워서, 목사(牧使) 윤가적(尹嘉績)과 이국헌(李國憲)이 모두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그 의심스러운 자 여섯 사람을 가두었는데, 그 뒤에 목사 엄찬(嚴纘)이 또 꾸짖어 욕보인 변고를 당하여, 그 사람을 곤장으로 때려 죽이고, 이로 인하여 체임되어 돌아왔었다. 이현일(李玄逸)이 경연(經筵)에서 엄찬의 치적(治績)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유임(留任)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목내선(睦來善)의 말로 인해서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의 공적비는 음성군 비석거리에도 1기 존재하고있다.

 

 

 

 

 

 

 

조선왕조실록 - 숙종 17년 신미(1691,강희 30)

윤 7월13일 (병인)
양진창을 주치와 금천으로 옮겨 세우게 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오시복(吳始復)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기유년충주(忠州) 가흥(可興)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는데, 계해년충주를 독진(獨鎭)으로 삼으려고 그 창고를 주치(州治)에서 6, 7리 떨어져 있는 양진(揚津)으로 옮겨서 이름하여 양진창(揚津倉)이라 하였습니다. 단지 그 땅이 낮고 축축하여 곡식을 저장하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창고 근처의 모집한 백성도 흩어졌으므로, 이제 목사(牧使) 이국헌(李國憲)이 그 창고를 주치와 금천(金遷)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대신(大臣)들에게 물어서 허락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대신들도 온편하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종도(閔宗道)가 말하기를,
“강도(江都)에 새로 만든 창고는 그 제도가 매우 좋아서 곡기(穀氣)가 소통하여 여러 해 동안 견딜 수 있는데, 대개 유수(留守) 신후재(申厚載)가 연경(燕京)에 갔을 때에 통주(通州)의 창고 제도를 보고 본떠서 만들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제도에 따라 옮겨 세우게 하였다.
【원전】 39 집 249 면
【분류】 *재정-창고(倉庫) / *구휼(救恤) / *외교-야(野)


[주D-001]기유년 : 1669 현종 10년.
[주D-002]의창(義倉) : 흉년(凶年)에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평년에 백성들로부터 곡류(穀類)의 여분(餘分)을 거두어들여 보관하던 창고. 춘궁기(春窮期)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철에 다시 거두어 들였음.
[주D-003]계해년 : 1683 숙종 9년.

 

 

 

 

조선왕조실록 - 숙종 19년 계유(1693,강희 32)

 5월18일 (신유)
충주의 죄수를 경옥에 잡아와서 엄중히 국문하여 처단하도록 명하다

조강(朝講) 때 충주(忠州)의 죄수를 경옥(京獄)에 잡아와서 엄중히 국문하여 처단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충주 아전들의 습속이 매우 사나워서, 목사(牧使) 윤가적(尹嘉績)과 이국헌(李國憲)이 모두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그 의심스러운 자 여섯 사람을 가두었는데, 그 뒤에 목사 엄찬(嚴纘)이 또 꾸짖어 욕보인 변고를 당하여, 그 사람을 곤장으로 때려 죽이고, 이로 인하여 체임되어 돌아왔었다. 이현일(李玄逸)이 경연(經筵)에서 엄찬의 치적(治績)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유임(留任)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목내선(睦來善)의 말로 인해서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원전】 39 집 280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조선왕조실록 - 숙종 22년 병자(1696,강희 35)

 2월20일 (병오)

이조에서 선치한 수령을 초록하여 아뢰고, 대신이 고쳐 뽑기를 청하다

이조(吏曹)에서 선치(善治)한 수령(守令)을 초록(抄錄)하여 아뢴 것이 모두 19인인데,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항(李恒), 밀양 부사(密陽府使) 홍득우(洪得禹), 용천 부사(龍川府使) 정이상(鄭履祥), 성주 목사(星州牧使) 남상훈(南尙熏), 청주 목사(淸州牧使) 정시선(鄭是先), 해주 목사(海州牧使) 조지항(趙持恒), 연안 부사(延安府使) 이관주(李觀周), 장성 부사(長城府使) 박시경(朴時璟), 전 목사(牧使) 유이승(柳以升)·엄찬(嚴纘)·정협(鄭悏), 사옹 첨정(司饔僉正) 권상하(權相夏), 재령 군수(載寧郡守) 심익창(沈益昌), 대흥 군수(大興郡守) 홍만선(洪萬選), 안산 군수(安山郡守) 정상박(鄭尙樸), 평양 판관(平壤判官) 유이복(柳以復), 영천 군수(永川郡守) 박규세(朴奎世), 삭녕 군수(朔寧郡守) 심정백(沈挺柏), 의성 현감(義城縣監) 이익저(李益著)였다. 이에 앞서 이조에 명하여 명망과 성적이 있는 수령을 초록하여 등용에 갖추게 하였는데, 판서 박태상(朴泰尙)이 실로 그 일을 맡았다. 뽑힌 사람들이 인망(人望)에 맞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따금 외람되게 낀 자가 있었으므로, 얼마 안 가서 대신(臺臣)이 고쳐 뽑기를 청하였고, 따라서 불시선(不時選)을 폐지하니, 식자가 아까와 하였다.
【원전】 39 집 41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