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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죽전리 장현광청덕비(報恩邑 竹田里 張顯光淸德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보은읍 죽전리 장현광청덕비(報恩邑 竹田里 張顯光淸德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8. 17. 10:32

 

보은읍 죽전2리 보은고등학교 옆 도로가에 두개의 선정비중 비를 바라보며 왼쪽의 비이다.

경북 구미에서 출생하여 42세에 보은현감을 지냈다는 안내표시판이 있고 잘관리되고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현감장후현광청덕비(縣監張侯顯光淸德碑)라고 음기되여있다.

비의 전체높이는 180이며 비면은 59*132*17이다.

비의 건립시기는 1595년이다

 

 

 

 

조선시대 벼슬 중에 '사또'(혹은 원님)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사또는 정식 벼슬이름이 아닌 '수령'(守令)을 달리 불렀던 표현이다. 수령은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을 준말이다.

이중 군수가 다소 높아 종4품, 현령은 종6품의 품관을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을 원님 중 가장 낮은 품계는 현감으로, 보통 종6품의 벼슬을 지녔다.

조선시대 원님은 지금의 시장, 군수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수령은 왕이 임명하고, 사법·군사·행정권을 행사했다. 이에 비해 지금의 시장과 군수는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행정권만 행사하는 점이 다르다.

고을 원님들의 임기는 보통 2년으로, 관찰사 1년보다는 다소 길었다. 이때 고을 원님 가족이나 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혼자서 임지에 부임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원님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기생 이야기가 뒤따른다.

우리가 춘향전에서 읽었듯이 남원 사또 변학도가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이른바 기생 점고였다. '점고'(點考)는 명부에다 일일히 점을 찍어가면서 사람의 수효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관기는 관에 속한 관물(官物)로 여겨졌다. 춘향전으로 널리 알려진 '열녀춘향수절가'는 점고 끝에 수청을 거절하는 춘향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곤장 태장 치는데는 사령이 하나 둘 세건마는 형장부터는 법장(法杖)이라, 형리와 통인이 닭쌈하는 모양으로 마주 엎뎌서 하나치면 하나 긋고 둘치면 둘 긋고, 무식하고 돈없는 놈 술값긋듯 그어놓니 한일(일)자가 되었구나.'

본문중 법장은 50대가 넘는 무거운 장형, 형리는 아전의 일종, 통인은 관의 잔심부름꾼 정도를 일컫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원님(수령·사또)은 지방에서 만큼은 관찰사(종2품) 1명만을 쳐다보면 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이 주어졌다.

이런 원님 자리를 세번이나 거부하다 거꾸로 치죄(治罪)를 당한 인물이 있다.

조선 명종~인조 연간을 산 인물로 장현광(張顯光·1554∼1637)이 있다. 그는 1595년 우리고장 보은현감에 제수됐다.

'정숙하(鄭淑夏)를 승정원 좌승지로, 정광적(鄭光績)을 우승지로, 오장(吳長)을 진안 현감으로, 장현광(張顯光)을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삼았다.'-<선조실록>

그러나 장현광은 어떤 이유에서 인지 충청감사에게 세번이나 사직을 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충청감사가 보고의 일종인 장계를 올리자 선조 임금도 이를 정식으로 문제삼았다.

"보은현감 장현광은 다른 사람과 달리 6품으로 발탁해 기용한 사람이다. 그런데 감히 벼슬을 버렸다. 그렇다면 그는 애초 관직에 취임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지금 벼슬을 버렸으니 자못 인신(人臣)의 도리가 없다. 잡아다가 추국(推鞫)하라."-<선조실록>

결국 장현광은 직무유기죄가 적용돼 의금부로 끌려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 심한 치죄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지을 정도의 당대 최고 주역 이론가였다.

'전 보은현감 장현광은 본래 가문의 조행이 있고 주역에 정통하였으며, 난리 후에 일찍이 의식(衣食)을 남에게 간청한 일이 없었으니, 참된 선비입니다.

국은이 융숭하여 6품으로 승격하였는데 태연스레 벼슬을 버리니 이는 실로 잘못입니다. 그

러나 만약 나국(拿鞫)까지 한다면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선조실록>

당시 임금에게 경서 등을 강의하던 검토관 김홍미의 발언이다. 나국은 죄인을 잡아다 국청에서 신문하는 것을 말한다.

 

 

보은현감(報恩縣監) 장현광의 선정(善政)

보은군 마로면 적암리 상주군과의 도계에 ‘솟곳바위’ 또는 ‘치마바위’라고부르는 큰 바위가 있고 이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된 데 대하여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회) 선생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장현광 선생은 서기 1554년에 태어나 서기 1637년에 세상을 떠난 분으로 자를 덕회(德晦), 호가 여헌(旅軒)이라고 부르는 이로 인동 장씨다. 그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제자이자 조카사위로 퇴계의 성리학을 전수 받았으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서기 1595년에 학문이 높고 행실이 바른 분으로 추천되어 보은현감(報恩顯監 - 오늘의 군수)에 임명되어 21일간 근무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형조좌랑(刑曹佐郞 - 법무부 계장급)에서부터 공조판서(工曹判書 - 건설부장관)에 이르기까지 20여 차례나 벼슬자리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모두 사퇴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속곳 바위의 이야기는 그가 보은현감에 있다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갈 때 이야기가 전개된다.

비록 한달 가량 재직하였지만 학문과 덕이 높은지라 고을을 다스림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또한 고을 백성들도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던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소문이 나자 고을 사람들은 너나 없이 좀더 계셔서 고을을 다스려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선생의 뜻을 꺽을 수가 없음을 깨닫고 이별을 아쉬워 하면서 전별의 선물을 가져왔다. 그러나 워낙 청빈한 현감인지라 모두 물리치고 부임할때와 마찬가지로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 인동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행차는 어느덧 군의 마지막 적암리에 도착하고 한말만 더 가면 이제 충청도를 지나 경상도 땅인 상주였다. 선생은 걸음을 멈추게 명하고 길가 나무그늘에 앉아 보은 고을 쪽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그도 가슴에 만감이 오고갔을 것이다. 선생의 눈길이 멈춘 것은 가난한 자신과 결혼한 이후 고생만 하는 아내의 무릎 밑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놀라움에 크게 떠졌다. 아내 치마 밑으로 삐죽이 나온 아내의 속곳이 처음 보는 황홀한 비단옷이었다.

“여보 부인 내가 가난하여 당신에게 옷 한 벌 못해 주었구려. 참으로 미안한 일이나 이제 부인의 속곳을 보니 처음 보는 비단이구려. 어디서 장만한 옷입니까?”하고 선생이 묻자 부인은 자랑이나 하듯 치마를 조금 더 걷어 올리며 “이 옷 말씀입니까? 우리 형편에 이와 같은 비단옷을 구할 수 있습니까? 어제 저녁에 당신께서 고향에 돌아가신다고 고을 백성이 섭섭하다고 저에게 선물로 가져온 것인데 처음 보는 비단옷이라 입고 가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한참 후에 “부인 우리는 참으로 가난하구려 그러나 가난하다는 것이 자랑이 되지는 못해도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때문에 나는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은 삼가고 청빈을 낙으로 삼아 살아왔소 그런데 비록 속곳 치마지만 남에게 폐를 주고 선물로 받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구려”하면서 다시 눈을 하늘 쪽으로 돌리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여보 제가 부덕이 부족하여 당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런 몹쓸 여자가 있습니까? 아직 보은 땅이니 저 앞에 보이는 바위 위에 두고 가면 보은에서 받은 물건을 보은에 돌려주는 것이 될 것인즉 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속곳을 벗어 바위 위에 걸친 후 다시 길을 재촉하여 고향을 떠났다 한다. 참으로 그 남편에 그 아내의 행실이 아닐 수 없다. 그 후부터 그 바위를 “속곳바위” 혹은 “치마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생의 높은 학문과 맑고 조촐한 덕행을 잊을 수 없었던 고을 백성들이 비를 세워 영원히 기리었고, 이 비는 현재 400여년이 지났지만 보은읍 죽전 2리 보은고등학교 정문 옆 길가에 우뚝 솟아있어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1554년(명종 9)∼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학자.

경상북도 인동 출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아버지는 증이조판서열(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팽석(彭錫)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부터 진사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571년(선조 4)「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576년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1591년 겨울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1594년 예빈시참봉·제릉참봉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해에 유명한 「평설(平說)」을 지었다. 1595년 가을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12월 관찰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을 청했고, 이듬해 2월 다시 세 번 사직을 청한 뒤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향리에 돌아갔다가 직무유기 혐의로 의금부에 잡혀갔다.

1597년 여러 차례 그를 조정에 추천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만났는데, 그의 학식에 감복한 유성룡은 아들을 그 문하에 보내어 배우게 하였다. 1601년 경서교정청낭청(經書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2년 거창현감·경서언해교정낭청(經書諺解校正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그 해 11월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했고, 형조좌랑에 옮겨졌으나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1603년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어서 의성현령에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 만에 돌아왔다. 1604년 순천군수, 1605년 합천군수, 160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08년「주역도설(周易圖說)」을 지었고, 1621년(광해군 13)「경위설(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戒)와 함께 여러 번 왕의 극진한 부름을 받았고, 사헌부지평·성균관사업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사헌부장령으로 부임하여 왕을 알현했고, 이어서 사헌부집의·공조참의로 승진되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석하도록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후 이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용양위부호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謝恩)했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부호군, 1628년 이조참판, 1630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지중추부사·의정부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군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삼전도(三田渡)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세상을 버릴 생각으로 동해가의 입암산(立嵒山)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의 한 사람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했고, 인조반정 직후에는 공신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함정수사를 시정하게 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심성론에서는 도심(道心)을 ‘미발지성(未發之性)’으로, 인심을 ‘이발지정(已發之情)’으로 파악했으나, 이미 발한 뒤에도 역시 도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도심이 인심 가운데 있고 인심이 도심 가운데 있어 별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가운데에서 본성을 따라 발현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사단일 뿐이라 하여 사단의 순수고유한 발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說)』·『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현광 [張顯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