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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동 충주수리조합장영목정일씨사업성공기념비(虎岩洞 忠州水利組合長鈴木政一氏事業成功記念碑) 본문
호암지 축조사업성공기념비이다
비의 전면에는 충주수리조합장영목정일씨사업성공기념비( 忠州水利組合長鈴木政一氏事業成功記念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의 뒷면에는 축조성공기념에 대한 내력이 적혀있다
비의 건립시기는 소화8년(1933년)이라고 적혀있다.
호암지의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현재 호암지 나룻터(일명 뱃집)에 있는 일본인 충주수리조합장 스즈끼 세이찌가 쓴 사업성공기념비 비문이 전부이다.
호암지는 스즈끼 세이찌가 충주면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1922년 공사를 착공하여 1932년 3월에 준공하였다.
호암지 개발의 주된 목적은 천수답 성격을 띤 모시래들(일명 달천평야 또는 충주평야)을 곡창지대를 조성하여,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할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3·1절을 맞아 충주 호암지 축조 이유를 왜곡한 일본인 기념비의 존재가 알려졌다. 충북환경운동연대는 1일 보도자료를 통해 "호암지는 군량미 수탈의 목적으로 강제동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호암지 인근에 세워진 일본인 기념비의 내용이 왜곡돼 있다고 주장했다. 환경연대가 공개한 '스즈키 마사이치 충주수리조합장 사업성공기념비' 비문에는 "호암지를 건립한 사람은 일본 야마나시현 출신 스즈키 마사이치씨로 충주를 사랑해 호암지를 만들게 됐다. 달천평야를 만들어 주민들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일심단결해 성심성의껏 호암지를 만들었다. 이 성공에 감사해 조선인들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그러나 환경연대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식량조달이 필요해지자 조선 전역에 수리조합을 설치하고, 저수지 확대에 들어갔는데 이 때 호암지도 축조됐다"면서 "호암지 축조는 군량미 수탈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결코 충주군민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달천평야(수리안전답)를 만들기 위해 강압적으로 농민들을 수리조합에 가입하도록 했고, 당시 11년간 공사에 동원된 충주군민들은 엄청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환경연대는 "충주시가 광복 70년이 된 지금까지 이 비를 방치한 것은 역사를 방치한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그 내용을 정확히 알려 아픈 과거를 잊지 않도록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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