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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축성 사적비(忠州 築城事蹟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충주 축성 사적비(忠州 築城事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4. 5. 14:06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 후기 축성에 대한 사적비.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를 겪은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조칙이 내려오자 1869년 2월부터 읍성을 개축하기 시작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준공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화강암 충주 축성사적비를 세웠으며, 앞면에는 축성 연대와 성의 크기, 문루의 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현재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 내, 충청 감영문 오른쪽 담장 부근에 세워져 있다.

충주 축성사적비는 일반적인 비의 형태로 지붕돌을 얹었으며, 크기는 대석 75×59㎝, 비신 53×140×30.5㎝, 지붕돌 70×104×40㎝이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제액은 ‘축성사적비’이며 앞면의 내용은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신미년(고종 8, 1871) 3월에 ‘행 목사 조병로’가 축성하였다”고 되어 있다. 비의 뒷면에는 도감관 좌수 유응오, 별감 유중건, 별간역 강서 김이황, 도색 김한표, 호장 김민수, 이방 이동혁, 색리 한응렬, 장교 고신철, 목수 도편수 김치성, 석수 김순원, 화원 승려 봉민 등 65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충주 축성사적비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관아공원 내에 보호 난간을 두른 채 담장 옆에 서 있다. 관리가 허술하여 사적비 앞면이 많이 긁히고 낙서가 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 이후 예성(蘂城)이라 불리며 존재하였던 충주성은 쇠락을 거듭하여 임란 때에는 성으로서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읍성이 조선 말기의 대외 정책인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각 지역에 내려진 성의 개, 보수 명에 따라 충주목사 조병로에 의해 약 10개월여에 걸쳐 개축되었다.

충주 축성사적비는 이러한 조선 말기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좌수, 별감 등이 유씨로, 고려시대 이후 충주 호족인 충주유씨로 짐작되는데, 현재 충주유씨의 후손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충주유씨가 조선 말기까지 충주의 유력한 가문으로 존재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목수, 석수, 화원 명단을 기록하여 그들의 노고를 치하함과 동시에 개축에 참여한 인물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