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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령헌(忠州 淸寧軒)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충주 청령헌(忠州 淸寧軒)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4. 5. 14:16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있는 조선 후기 충주목사가 집정하던 동헌.

[변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277년(충렬왕 3) 충주성이 개축(改築)되었고 1870년(고종 7) 병인양요 후 조칙에 의해 충주성이 개축되었다고 한다. 충주 청령헌은 1870년 8월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 조병로가 중건하여 세웠다.

그 후 1895년(고종 32)에 전국이 23개 부로 나뉘면서 충주부의 관찰사가 사용하였고, 이듬해 13도 행정 구역으로 변경되면서 충청북도관찰사의 집무실이 되었다. 또 1908년(순조 2) 5월 25일 청주로 도청이 이전되면서 충주군수의 정청(政廳)으로 이용되었다. 그 후 한말 의병 운동기에는 호좌의병장 의암 유인석이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여 위세를 크게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형태]
남향한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중건되었는데, 중앙 3칸은 우물마루를 깔아 넓은 대청으로 사용하였으며, 오른쪽 끝 1칸은 대청보다 조금 높여 앞뒷면에 툇마루를 둔 마루방으로 삼았다. 대청 왼쪽 2칸에는 앞뒷면에 툇마루를 두어 온돌방으로 사용하였다. 왼쪽 끝 1칸에는 온돌방 아궁이를 만들기 위해 아래 부분에는 함실을, 윗부분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구조는 가공된 장대석으로 2단 축조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의 기둥자리를 새겨 8각의 주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워 이익공계 양식의 공포(栱包)를 구성하였고, 위로 추겨올려 돌출된 익공의 선단에 연꽃 무늬 장식을 조각하였다. 내부의 경우, 초각(草刻)을 한 보아지가 퇴량을 받치고 있는 창방으로 결구되었고, 기둥 사이로는 초각이 없는 화반(花盤)을 각 1칸에 1구씩 배치하여 주심도리 장혀를 받치고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 사이에 양내고주(兩內高柱)를 세워 대량과 퇴량을 짜맞추었는데, 대량 상부에 낮은 동자주(童子柱)를 놓고 종량을 받치도록 하였다. 종량 상부 가운데에는 사다리꼴 대공(臺工)을 설치하여 종도리와 뜬 창방의 이중 도리와 함께 옥개 부분의 하중을 받치도록 한 비교적 규모가 큰 7량가이다.

[현황]
충주 청령헌 건물 가운데 윗면에는 ‘청령헌(淸寧軒)’이라 쓰인 현판이 붙어 있으며, 충주읍성(현 관아공원) 내에는 충주 청령헌을 비롯하여 충주 제금당산고수청각 건물이 남아 있으며, 충주성 축성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축성사적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충주 청령헌은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전체적으로 보면 입면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지붕이 관아 건물이라는 권위를 드러내며, 앞뒤로 퇴가 구성되어 있어 앞면은 개방적이고 뒷면의 퇴는 각 실마다 높이를 달리하여 변화 있도록 구성하고 있다.

[참고문헌]
•  『문화유적분포지도』-충주시(충주시·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1998)
•  『충북의 건축문화』(건축문화의해 충청북도조직위원회, 1999)
•  『충주시지』(충주시, 2001)
•  『충주시 문화유적』(청주대학교박물관, 2002)
•  『충주문화재대관』(충주시, 2003)
•  『중원의 역사와 문화유산』(충주박물관, 2008)
•  허인욱, 「충주읍성의 변모고」(『예성문화』16·17, 예성문화연구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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