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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녕군 묘( 敬寧君 墓 )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경녕군 묘( 敬寧君 墓 )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4. 6. 19:51

 

경녕군 신도비(敬寧君神道碑)는 방구모랭이에서 안음골로 들어오다 보면 첫 번째 집옆에 있다.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가운데 세웠다. 기단부는 하대석에 용을 조각하였고, 두 마리의 거북이가 받친 위에 연꽃을 조각한 비신(碑身)받침 위에 신도비를 세웠다. 비신은 사면의 너비가 같은 사각형으로 사면에 글씨를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경녕군신도비’라고 비명을 쓰고 왼쪽면부터 비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경녕군(敬寧君, ?∼1458(세조 4)은 조선 태종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비(裶), 자는 정숙(正淑)이다. 어머니는 효빈김씨(孝嬪金氏), 부인은 청풍김씨(淸風金氏)로 관(灌)의 딸이다.태어날 때 옥상에 백룡이 도사리고 있는 이상한 징조가 나타나 궁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현인(賢人)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였다. 천성이 어질고, 어려서부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학문에 밝아 양녕대군(讓寧大君)·효령대군(孝寧大君)·세종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의 5조에 걸쳐서 왕실과 국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충성을 다하여 해결하도록 노력하였다.
1419년(세종 1)에는 명나라 사신 태감(太監) 황엄(黃儼) 등이 오자 왕자를 대신하여 태평관에서 접대하였고, 또 황엄이 왕자의 사은(謝恩)을 요구하자 사은사(謝恩使)에 뽑혀 북경에 가서 명나라 성조(成祖)로부터 기린·사자·복록(福祿)·수현사(隨現寺)보탑사(寶塔寺) 등 상서로운 그림 다섯폭과《신수성리대전 新修性理大典》·《사서오경대전 四書五經大典》등과 황금 100냥, 백금 500냥, 말 12필, 양 500두, 비단 50필,명주 500필 등 많은 물품을 얻어왔다.
세종 초에 기생 일타홍(一朶紅)과의 염문이 문제되어 대간들로부터 여러 번 탄핵받았으나 세종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430년에 대광보국(大匡輔國)이 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충주로 피하여 여생을 마쳤다. 묘지는 충주 황금산(黃金山)에 있고,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경녕군부인김씨묘소(敬寧君 夫人 金氏 墓所)는 도지정기념물 99호로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산 15-1에 위치해 있다. 청풍김씨는 좌찬성 김관(金灌)의 딸로서 태종 16년(1416)2월 기축(己丑)일에 경녕군과 혼인하였다. 태종께서는 경신택주(敬愼宅主)의 당호와 안산군 부인(案山君 夫人)의 첩지를 내리었다.
세종 32년(1450)4월15일에 서거하여 문종이 상구(喪具) 일체(一切)를 하사하여 이곳에 예장 되었다. 세조4년(1458) 삼한부부인(三韓府夫人)에, 고종 9년(1872) 청원부부인(請願府夫人)으로 추봉 되었다.
이 묘소는 거의 사각형의 장방형(長方形)이 묘제의 특징이다. 그리고 등석(燈石, 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의 흉부(胸府) 등에 특이한 조각문양은 왕족묘소 연구에 좋은자료가 된다.


경녕군 신도비는 주덕읍 사락리 음동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경녕군 신도비는 크기는 186×90×90cm로 좌수에 백용(白龍)이 생동하며 천년(千年)을 살고 이후에도 신통(神通)하라는 뜻으로 거북이 받치고 있는데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는 산소를 수호(守護)하였고, 상단의 용 네 마리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승천(昇天)하는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경녕군은 조선시대 태종의 제1남으로 효빈(孝嬪) 김씨의 소생으로서 태조4년 12월13일 탄생하여 태종 14년 正과 元이를 거쳐 태종 17년 정유(丁西)에 정헌대부(正憲大夫(正2品) 경녕군으로 책봉되었다. 세종대왕의 사부(師傅)가 되기도 하였던 그는 세종원년(1419년)에 사은사로 명나라 연경을 다녀왔으며 세종 7년(1425년) 숭록대부(崇祿大夫(從1品), 세종 12년(1430년)에 대광보국(大匡輔國(正1품)의 벼슬을 하였다.
세조4년(1458년) 9월 9일 64세의 나이에 거(去)하니 세조는 삼한공(三韓公)으로 추증(追贈)하고 제간(齊簡)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는데 1872년 고종황제의 영(令)으로 종정경(宗正卿)을 추증 받았다.

 

 

 

 

                              [경녕군의 구 묘비이다 글씨가 음각되여 있는데 잘알아보기 힘들다]

 

 

 

실록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생 이름이 등장한다. 장중경(掌中輕), 세류지(細柳枝), 내한매(耐寒梅), 일타련(一朶蓮), 적선아(謫仙兒), 계궁선(桂宮仙), 승양비(勝楊妃).

장중경은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출 정도로 가려리다, 세류지는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허리, 내한매는 추운 겨울을 견뎌낸 매화, 일타련은 진흙속의 한 송이 연꽃, 적선아는 죄를 지어 인간세계로 귀양온 선녀, 계궁선은 달나라 궁궐에 사는 선녀를 각각 일컫고 있다.

여러 기생 이름중 압권은 아무래도 승양비(勝楊妃)인 것처럼 보인다. 미모로 양귀비를 뺨친다는 뜻이다. 기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낸 왕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건 말건 자기 욕심부터 채웠다. 여기에도 승양비, 내한매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녀(妓女) 승양비(勝陽妃)·내한매(耐寒梅)는 자색(姿色)이 있었는데, 계성군(桂成君) 이순(李恂)이 가까이하는 바였으므로, 비록 감히 원(院)에 뽑아 들이지는 못하였으나, 왕이 자주 비밀히 불러다가 간음하였다.'-<연산군일기>

조선시대 기생 이름 중 영자, 순희 식으로 흔한 이름은 '홍일점'(紅一點) 또는 '일점홍'(一點紅)이었다. 두 단어는 같은 뜻으로, 글자 그대로 푸른 잎 가운데 핀 한 송이의 붉은 꽃을 의미한다. 비유하면 남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한 명의 여자 정도가 된다.

그러나 홍일점은 토산이 아닌 수입된 표현이다. 송대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왕안석(王安石)은 영석류시(詠石榴詩)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온통 새파란 덤불 속에 핀 붉은 꽃 한 송이(萬綠叢中紅一點) /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의 색깔은 굳이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動人春色不須多)'.

조선초기 왕족 중에 기생 일점홍과 놀다가 혼쭐이 난 인물이 있다. 경녕군(敬寧君·?∼1458)이다. 그는 태종(이방원)의 제 1 서자로 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웠다. 조선시대에는 왕족이라도 국상 중에 바람을 피우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가 이를 어겼던 모양이다. 사헌부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경녕군 비가 일찍이 선지(宣旨)로 본정역이 된 기생 일점홍(一點紅)에게, 태종이 빈소에 계시던 처음부터, 여러 번 식량과 신물(信物)을 보냈고, 국상(國喪) 기간 내에 영인(伶人)을 광효전에 불러다 재우면서 가만히 서로 모의하여 일점홍을 집으로 불러다가…'-<세종실록>

결국 세종은 경녕군에 대해 궁궐출입 금지를 명령하나, 1년만에 바로 해제한다. 세종과 경녕군은 이복형제 사이였다. '경녕군(敬寧君) 이비에게 출입(出入)하는 것을 허가하고, 구사(驅史)를 돌려주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구사는 말부리는 하인을 말한다.

경녕군의 묘가 우리고장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음동 마을에 위치한다. 일설에는 세조가 집권하자 이곳으로 피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문헌으로는 관련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세조는 도리어 삼촌뻘인 그에게 후한 부의를 내린다.

'경녕군 이비가 졸하니, 조회와 저자를 3일 동안 정지하고, 부의(賻儀)로 쌀·콩 아울러 1백 석과 종이 2백 권, 정포 40필, 백저포 3필을 하사하였다.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음동 마을에 있는 조선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의 묘.

[개설]
경녕군(敬寧君)조선 태종효빈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이비(李裶), 자는 정숙(正淑)이고, 부인은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학문에 밝아 양녕대군·효령대군·세종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의 5조에 걸쳐 왕실과 국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충성을 다하였다. 1419년(세종 1) 의 사신 황엄(黃儼)이 오자 왕자를 대신하여 접대하기도 하였고 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30년 대광보국(大匡輔國)이 되었고, 세조가 즉위하자 충주로 피하여 여생을 마쳤다.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위치]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 입구의 덕신초등학교를 지나 2㎞ 정도 직진하면 왼쪽으로 이상급 묘가 나오는데, 그 옆에 위치한다.

[변천]
경녕군 묘는 실전(失傳)되었다가, 족보의 기록에 따라 후손이 묘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장마로 인하여 묻혀 있던 묘비를 발견함에 따라 경녕군 묘가 확실하게 밝혀졌다. 1872년(고종 9) 고종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그 시기에 묘 앞의 석물이 갖추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2단의 지대를 쌓고 그 위에 설치된 묘는 71㎝ 높이의 22장의 화강암 판석을 두른, 둘레 2,050㎝, 지름 약 600㎝, 높이 약 200㎝의 원형분이다.

[금석문]
구묘표는 비좌 직수의 형태로, 크기 42×16×124㎝인데, 비제는 훼손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신묘표는 지붕돌 102×77×50㎝, 비신 51.5×29×156㎝, 대석 105×78㎝의 크기이다. 전액(篆額)은 ‘태종대왕자(太宗大王子)’라 전서체로 쓰고, 비제(碑題)는 ‘경녕군삼한공시제간추봉령종정경지묘(敬寧君三韓公諡齊簡追封領宗正卿之墓)’라 하였다. 17대손 이건영(李健永)이 다시 건립하였다.

[현황]
풍수적으로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이라 홍살문 앞쪽에 인공 연못을 조성하였고, 사우인 명덕사는 3칸 맞배지붕의 건축물로 묘역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있다. 묘역에는 210㎝ 정도의 망주석 1조, 215㎝ 크기의 무인상 1조, 193㎝ 크기의 문인상이 안면이 크게 훼손된 상태로 1조 있다.
한편 190㎝ 정도의 석등, 91×135㎝ 크기의 석양(石羊) 1쌍이 경녕군 묘를 지키고 있다. 경녕군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구묘표, 신묘표, 석양, 석등 등이 있다. 이중 문인상과 상석을 제외한 나머지 석물은 최근 도난을 당하여 종중에서 새롭게 조성하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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