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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동 김효성선정비(城安洞 金孝誠善政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성안동 김효성선정비(城安洞 金孝誠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10. 27. 09:42

 

 
김효성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행원(行源),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아버지는 양양부사(襄陽府使) 김수연(金秀淵)이며, 어머니는 좌승지 김희룡(金希龍)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에 합격하였으나, 1615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하자 고부천(高傅川)·김태우(金太宇) 등 24인과 함께 정조·윤인·이위경 등 3인의 목을 벨 것과 귀양가 있는 이원익(李元翼)을 다시 부를 것을 주청하였다가 길주(吉州)로 유배당하고 다시 진도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복관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道事)를 제수받아 상경하던 중 청안현감(淸安縣監)이 되었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청안향교 앞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1625년 잠시 관직을 떠났다가 이듬해 호조좌랑에 올랐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비를 호위하였고, 1628년에 괴산현감과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634년 중앙의 관직으로 들어가 한성부서윤·형조정랑·군기시첨정 등을 지내고 이듬해 여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이어 남원·죽산부사와 공주·청주목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50년 청나라 사신 접대를 소홀히 하였다하여 파직되었다가 곧 칠곡부사(漆谷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오랜 외직생활 동안 선정을 베풀어 청빈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청주목사 시절 선정으로 1651년(효종 2)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가 세워졌는데 현재도 청주시 중앙공원에 남아있다.
또한 그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무예에도 조예가 깊어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과 위장을 맡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인조실록』 『괴산군지』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