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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농정유허비(務農亭遺墟碑) 본문
1688년(숙종 14년)에 청주(淸州)에 건립된 무농정(務農亭)의 유허비(遺墟碑)로, 한익저(韓益著)가 비문을 기록하였다.
무농정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인 한란(韓蘭)이 농사를 짓던 장소에 정자를 지어 ‘무농정’이라 하고 농사를 권장했던 곳으로, 그 뒤 정자가 허물어졌던 자리에 후손 한익저가 유허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무농정을 세운 뜻과 유허비가 세워진 과정, 무농정의 상량문(上樑文) 등이 소개되어 있다.
務農亭遺墟碑
務農亭遺墟碑文
務農亭古我 始組太尉公之所刱也 太愍方其末遇隱德 丘圍監郊作亭庀來力田功命名日 務農坪之得號者赤以也 伊後八百餘餘禩後孫韓公根節度湖西錦還本州首就方井舊里隊輿宗人遡 太尉之遺蹟則所謂務農亭傳其號而末見其在子於是謀所以依式尋其遺址築土而封爲尌石而表之徵信噫公之來也 旣新乎 反始之堂又標乎 務農之亨譬之如室 畢鎭其甍嗚呼任哉 崇禎後戊辰夏後孫生員韓益著謹識
雲地因千年之礎伯常之後 待今日之賢侯 天順以來閱幾人之迭代 美哉 重建之制度恢於肇創之䂓模烏欲過而回飛 蜃善幻而失彩 窓迎碧峀北對上黨之城 軒壓靑蕪 南臨武陵之野 中天驚突兀之勢 明府愈尊特地 見扶搖之形雄都益壯 勗爾郅匠 廳我巳謳 兒郞偉抛樑東 銅柱崔嵬鎭地 雄衙羅登臨疑羽化仙聞笙鶴有無中 兒郞偉抛樑西 鵲野蒼茫母岳低惠 如春雨淸如水爭道賢召杜齊 兒郞偉 抛樑南 挹淸堂下水如藍 日永公庭無一事 可抛朱墨釣淸潭 兒郞偉 抛樑北 白玉樓高還咫尺 別有瀛州在日邊 望中莫遺浮雲隔 兒郞偉抛樑上 萬里烟霞入遐想 羽衣何似東坡翁 欲叙冷風到崑○ 兒郞偉抛樑下 玄琴白鳥鳴相和 枳棘雖非鳳可栖 雕樑還有鷰爭賀 伏願上樑之後 群鸞集樹 雙鵲巢詹 士女皆歡 自屋無怨 神仙可見 玄圃非遠 地接三山 藥試蓬萊之靈草 春敷百里花爭桃李之芳 秋天月明何異庾公之乘與 政化風動莫似班子之登山
무농정(務農亭) 유허비문(遺墟碑文)
무농정(務農亭)은 예전에 우리 시조(始祖)이신 태위공(太尉公)께서 창건(創建)한 곳이다. 태위공께서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하여 덕(德)을 숨기고 은거(隱居)하고 있을 때, 언덕에 올라 들판을 돌아보고 나서 정자(亭子)를 세웠다. 그리고는 여기에서 농경(農耕)의 정책(政策)을 강구(講究)하였다. 이 정자의 이름이 ‘무농(務農)’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 뒤 800여년이 지나서 후손인 한공 근(韓公根)이 충청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고향인 청주(淸州)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공은 방정리(方井里)의 종인(宗人)들과 함께 태위공의 유적(遺蹟)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무농정은 겨우 그 이름만 전하져 올 뿐이고 실물(實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기에다가 후세(後世) 사람들이 조상을 숭배하고 본받을 바를 강구하여 그 유지(遺址)를 찾아 토대(土臺)를 축조(築造)하고 그 위에 표석(表石)을 세워 후손들이 징험(徵驗)할 신표(信標)로 삼았다. 아! 공이 여기 오신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미 반시당(返始堂)도 새롭게 해 놓았고, 또 무농정의 표석까지 세워 놓았다. 비유하자면 마치 집이 용마루에서 온 힘을 다 펼치듯이 하였으니, 아! 그 책임을 다하였도다.
숭정(崇禎) 후 무진년(숙종 14, 1688년) 여름에 후손(後孫)인 생원(生員) 한익저(韓益著)는 삼가 기록하다.
구름 낀 땅은 천년의 기초를 인하고, 백상(伯常)의 후손은 오늘의 어진 분을 기다렸다. 천순(天順) 이후로 몇 사람이 번갈아 교대하였는지를 살펴보건대, 아름다워라! 중건(重建)할 때의 제도(制度)가 처음 지었을 때의 규모보다 넓어, 새가 넘어가려다가 돌아서 날아가고 이무기가 변환을 잘하지만 빛을 잃었다. 창문은 푸른 산굴을 맞이하여 북쪽으로 상당성(上黨城)을 마주하였으며, 마루는 푸르고 무성한 풀을 누르며 남쪽으로 무릉의 들판을 바라본다. 중천(中天)은 그 우뚝한 기세에 놀라고 관부(官府)는 더욱 존중되었으며, 이 특별한 지역은 약동하는 형세를 보여주고 웅도(雄都)는 더욱 장하게 되었다. 힘써 수고한 장인들이 나에게 청하므로 노래하노라. 어영차! 대들보를 밀자꾸나. 동쪽으로. 구리기둥 높이 솟아 웅장하게 땅을 짓누르고, 아라(衙羅)가 등림(登臨)하니 신선되어 나르는 듯하여라. 신선은 생황 소리 학 소리 들리는 듯하다네. 어영차! 대들보를 밀자꾸나. 서쪽으로. 까치 나는 들판은 아득히 멀어 모악산(母岳山)도 나지막하고, 은혜는 봄비처럼 고맙고 맑기는 물과 같아라. 바둑 두는 현자(賢者)는 두제(杜齊)를 부르네. 어영차! 대들보를 밀자꾸나. 남쪽으로. 읍청당(挹淸堂) 아래의 물빛은 쪽빛과 같구나. 기나긴 날 관아의 뜰에는 아무 할 일 없으니, 일거리 제쳐두고 맑은 못에 낚싯줄이나 드리워볼까. 어영차! 대들보를 밀자꾸나. 북쪽으로. 높다란 백옥(白玉) 누각 도리어 지척에 있고, 햇님 곁엔 영주(瀛州)가 따로 있는데, 뜬구름이 가로막아 바라보아도 보이지 않네. 어영차! 대들보를 밀자꾸나. 위쪽으로. 머나먼 안개와 노을은 그리운 사람 생각나게 하는데, 우의(羽衣)는 어찌하여 소동파(蘇東坡)를 닮았는가. 찬바람 펼치려고 곤륜산에 이르렀네. 어영차! 대들보를 밀자꾸나. 아래쪽으로. 거문고와 백조는 서로 울어 화응하고, 탱자 가시는 봉황새가 깃들일 곳 아니지만 조각한 대들보는 도리어 제비가 다투어 하례하네. 삼가 상량을 한 뒤에는 뭇 새들이 나무로 모여들고 한 쌍의 까치가 처마에 집을 지어 남녀가 모두 기뻐하고 집에서부터 원망이 없어지기를 바라니, 신선이 볼 것이다. 현포(玄圃)가 멀지 않으니 약은 봉래산(蓬萊山)의 신령한 풀을 시험하고, 봄이 백리에 펼쳐지니 꽃은 복숭아 꽃, 자두 꽃과 다툰다. 가을 하늘에 달 밝으니 어찌 유공(庾公)이 탔던 수레와 다르겠는가. 정치로 교화하여 백성들이 바람처럼 따르니 반자(班子)가 산으로 올라간 것과는 같지 않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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