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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읍 당곡리 십이장신당(永同邑 堂谷里 十二將神堂 ) 본문
영동시내를 벗어나 당곡리로 향하는 길을 가다보면 한가로운 농촌풍경이 펼쳐진다
길을 달려 당곡리 종점으로 향해 차를 몰다보면 좌측 개울건너 버섯사 옆에 당곡리 십이장신당이 보인다.
관운장을 비롯하여 12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신당.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당곡리에 위치하며,
1972년 12월 26일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영동군 당곡리는 ‘당(堂)이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곧 십이장신당(十二將神堂)을 이전한 이후에 생겨난 명칭이다. 신당은 애초 상촌면 고자리 ‘산너머당골’에 있었다. 어느 날 영동군수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 ‘이곳이 바람이 세어 못 살겠으니 고곡리로 옮기라’고 지시하여 사당을 옮기고 마을명을 당곡리로 개칭하였다.
당은 흔히 ‘관우사당(關羽祠堂)’ 또는 ‘관우묘(關羽廟)’로 불리고 있으며, 본당(本堂)과 별각(別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당에는 ‘12장신’의 영정, 별각에는 관우의 적토마 화상을 각각 모셔 놓고 있다. 본당의 12장신은 구체적으로『삼국지(三國志)』의 주요 등장인물로서 관운장(關雲長), 장익덕(張翼德), 제갈공명(諸葛孔明), 조자룡(趙子龍), 황충(黃忠), 강유(姜維), 마초(馬超), 마직(馬稷), 요화(寥化), 위연(魏延), 창위(菖偉), 마축(麻竺) 등이다. 본당은 16.5㎡ 규모의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 형태이다. 별각은 0.66㎡ 규모의 맞배지붕 형태이다.
이들 12장신의 영정을 모신 기와집 옆에는 관우의 말인 적토마(赤兎馬)의 그림을 걸어놓은 조그마한 별각(別閣)이 있다. 관왕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대가 왜군을 물리친 것이 관우의 음조(陰助)라 하여, 서울에 1599년(선조 32)에 남묘(南廟), 1602년에 동묘(東廟)를 세우고 국가행사로 제사를 지내면서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는데, 이 무렵 영동에도 하고자리에 관왕묘가 세워졌다.
그러던 것이 1908년에 나라에서 관왕묘의 제사를 폐지하자 지방의 관왕묘는 거의 없어져버렸는데, 영동에 아직 이 관왕묘가 남아 있는 것은 당시 영동군수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서 관왕묘의 복원과 제사를 원하므로, 군수가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옮기고 12장신당이라고 부르게 한 덕분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곳을 신당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당곡이라는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관왕묘의 제사는 원래 관행제(官行祭)였으나, 이곳 당곡리로 신당을 옮긴 뒤부터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동제로 지내고 있다. 매년 제관을 선정하여 음력 정월 14일 밤에 유교식으로 치른다.
이때 제물은 제전(祭田)을 경작하는 사람이 준비한다. 이것은 관우를 무신(巫神)으로 섬기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민간신앙이 역사적 사실성보다는 신화적인 실재관(實在觀: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이다.
십이장신당 옆에는 신당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쓴 사람들의 공적비가 2기 자리하고 있다.
십이신당의 보존과 건축에 힘쓴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리민들의 이름으로 공적비를 세웠다.
당곡리 십이장신당의 연원은, 다만 전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관련한 전설이 『전설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신당은 상촌면 고자리에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영동현감 꿈에 신당의 주인격인 관운장이 현몽하여 말하기를, ‘내가 지금 있는 자리가 편치 못하니 저 산 너머 고곡리 정결한 곳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하기에 그 후 신당을 고곡리로 옮기고 마을이름도 당곡리로 바꿨다고 한다.
때는 선조대왕 25년 어느 봄날이다. 선조대왕께서는 춘곤을 못 이겨 깊은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위풍이 당당한 한 장군이 적토마를 타고 청룡도를 들고 삼각수를 날리며 늠름하게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선조대왕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아우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 나는 삼국시대 관우인데 우리의 의리와 인정을 잊지는 않았겠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말일세. 우리 삼형제는 살아서는 합심협력하며 서로를 도왔고 특히 형님(유비)이 촉한의 왕이 되자 나(관우)와 동생(장비)은 촉한에 충성을 바치고 마침내 순국하지 않았는가? 우리 삼형제는 한 세대가 끝나고 영혼의 세계에서도 그 의를 지켜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형님은 명나라의 신종황제가 되고 나는 전쟁에서 인명을 너무 많이 해쳐서 인간 환생이 안 되었고 아우는 현재 조선왕이 되었지. 머지않아 동생의 나라에는 큰 병란이 일어날 텐데 아무 방비도 없이 나날이 보내는 동생이 딱해서 지금 내가 일깨워 주러 왔네. 이 난리는 표독한 왜적이 쳐들어오는 난리인데, 7~8년이나 걸릴 테니 명나라 신종황제(유비)에게 구원을 청해서 수습하도록 하게. 내가 신종황제에게 도원의 고사를 들어 간곡히 부탁할 테니 주저 말고 시행하게’하고 사라졌다. 이상한 꿈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아찔하고 머리가 핑 돌았다. 선조대왕은 조정의 백관과 더불어 방책을 논의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힘없는 조정은 별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관운장이 현몽한 것처럼 선조 25년 4월 왜군 15만이 부산에 상륙하여 쳐들어오니 이것이 임진왜란인 것이다. 막아낼 재주가 없는 선조대왕은 서울을 비우고 의주로 피란을 가니 삼천리 강산은 초토화가 되고 피가 흘러 강이 되었다. 이 틈에 많은 보물과 문화재는 왜적들의 손에 들어갔고 피란민들은 쫓기다 굶어죽은 자가 부기지수였다. 임진왜란이야말로 반만 년 이래 대전란이었는데 자칫하면 국맥이 끊어질 뻔한 위기에까지 다다랐다. 선조대왕께서는 의주에서 사신을 명나라 신종황제에게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그 요청이 간곡해서인지, 관우의 신종황제에 대한 현몽에 감동해서인지 신종황제는 이여송을 총수로 하여 5만의 군사를 파병하였는데 마침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 장군님의 활약으로 전쟁은 가까스로 끝이 났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간에 겪은 말할 수 없는 오욕과 회한과 비통과 수모를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마는 그 중에서도 잊지 못할 것이 있다. 그것은 관우의 현몽이요,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관제묘를 건립하였는데 명나라 신종황제는 사신을 보내어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이상의 전문을 통해 당곡리 십이장신당의 연원을 조선시대 선조대로 소급할 수 있다. 또한 국난의 위기를 ‘관운장’이라는 명장을 통해 극복하려는 데에서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곡리 십이장신당에서는 해마다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이를 흔히 ‘산제 잡순다’고 한다. 제일은 정월 열나흗날이며, 제관은 관운장 명의의 밭 660여 ㎡를 경작하는 이달용(1937년생)이다. 이 밭은 원래 1941년에 사망한 이용석 명의의 소유였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관운장 명의의 땅이 되었다. 이달용이 이 땅을 경작하는 대가로 십이장신당 및 제의를 관리하고 있다. 제장은 산제당(山祭堂), 큰당(十二將神堂), 마방집(十二將神堂別閣), 새터 남근석, 당골 돌무더기 등 다섯 곳이다. 금기는 제의 사흘 전부터 수행한다. 술, 담배, 부부관계 등을 금하고 매일 목욕재계한다. 마을 사람들도 제의 당일에는 가능한 외부 출입을 삼간다.
제의는 자정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산제당에 올라가 메, 소금, 동동주 등을 진설한다. 제의 절차는 분향-헌작-재배 순이다. 두 번째 제장은 큰당이다. 당 문을 열고 제단에 백설기, 포, 쌀, 동동주 등을 진설한다. 제의 절차는 분향-헌작-독축-재배 순이다. 세 번째 제장은 마방집으로, 마방집의 문을 열고 제물 약간을 떼어 진설한다. 제의 절차는 분향-헌작- 재배 순이다. 네 번째 제장은 새터 남근석 앞이다. 제물 진설 및 제의 절차는 마방집에서와 동일하다. 다섯 번째 제장은 당골 돌무더기 앞이다. 제물 진설 및 제의 절차는 마방집에서와 동일하다. 제의를 끝내고 날이 밝으면 마을회관에 모여 제수떡과 제주를 조금씩 나누어 먹는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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