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사락리 문화유씨 열녀문(社樂里 文化柳氏 烈女門)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사락리 문화유씨 열녀문(社樂里 文化柳氏 烈女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4. 6. 20:58

 

 

 

 

 

 

 

 

 

 

 

 

사락리 음동에 위치한 이상급신도비와 묘소 사이에 있는 열녀문화류씨정문은 단칸 목조와가(木造瓦家)로 정문 안에는 정려(旌閭)명칭과 정려를 받게 된 내용이 걸려 있다.
정려 명칭은 “열녀 통덕랑 이학보 처 유인문화류씨 지려(烈女通德郞李學普妻孺人 文化柳氏之閭)”로 세로로 두 글자씩 쓰여 있다.

정려를 받은 시기는 영종대왕 32년(1756년) 을사 9월로 기록되어 있다. 영종대왕은 묘호가 바뀌어 영조대왕으로 부른다.
정려를 받게 된 내용은 “비문이 지방문화재 63호로 지정받은 신도비 충강공의 5대손부로써 조부는 통정대부 여주목사(通政正夫驪州牧使)를 지내셨고 부친께서는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 도사(都事) 벼슬을 하시어 태원종공일등(泰原從功一等)에 계시었고 그의 아드님이신 분은 문필단세(文筆壇世)하시어 돌아가신 후에 증첨추통덕랑 (曾僉樞通德郞)의 직을 받으신 어른으로서 항상 청빈한 생활을 하시던 어른이시다.
부인문화류씨는 부군께서 환후로 와석불기(臥席不起)하실 적에 치병에 성의를 다하시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시는 부군의 입에 흘려드리고 그 곁은 떠나실 줄 모르시더니 그 성의가 무심하게도 부군은 타계하시고 마셨다. 그 때 연세는 48세, 장례를 모시는데 문화류씨 부인은 소복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정좌하시어 비복에게 장례 후 반혼을 물으시며 비복이 반혼하신다고 아뢰니 부인은 26세의 나이로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사실이 온 고을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니 영종대왕께서 불경이부(不更二夫)의 烈女節槪를 갸륵하게 여기시어 열녀정려문을 명정(銘旌)하셨으니 이를 옛 정문거리에 세워 봉승(奉承하시다가 옛 난화(亂火)에 소실이 된 것을 현판만 떼어 보관하고 있다가 복원 사업을 단기 4325년(1992년) 임신(壬申) 8월 24일기해(己亥)에 준공을 보아 현판식을 갖게 되었다.